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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방송 (上)]'방송 모르는 방송위' 정권 눈치만…

입력 | 2002-01-20 18:15:00


《방송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주요 방송 정책의 표류와 방송 프로그램의 저질화가 심화되고 있다. 특히 방송위의 ‘행정 및 정책 실패’는 방송위 자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배경에는 한국 방송 시장을 주도해온 KBS 등 지상파 방송 3사와 이에 맞서는 위성방송 등 뉴미디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방송위의 문제, 지상파 ‘빅3’와 방송위의 관계, 해외 방송정책기관의 사례 분석 등을 통해 바람직한 방송정책 대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7일 김정기 방송위원장이 전격 사퇴하게 된 직접적 배경은 디지털위성방송(이하 스카이라이프)의 지상파 재전송 논란. 스카이라이프가 법적 의무 사항이었던 KBS, EBS 외에 MBC, SBS를 재전송하려 하자 MBC 19개 지방계열사와 부산 대구방송 등 지역민방들이 지역방송협의회를 결성해 맞섰다. 지역방송협의회는 “위성방송이 지상파를 모두 재전송하면 지역 방송과 지방문화가 설자리를 잃는다”고 주장했다.

방송위는 숙고 끝에 지난해 11월 스카이라이프 출범 후 2년간 MBC, SBS의 전국 위성방송을 유보한다는 ‘미봉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역방송협의회 관계자들은 방송위의 결정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두달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문제는 당초부터 방송위가 개입할 법적 근거가 미약했던 사안이다. 방송법상 의무 재전송으로 규정된 KBS, EBS 외에 MBC, SBS 등의 재전송 여부는 해당 방송사와 사업자 간의 계약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 방송위 관계자도 “방송위가 감당 못할 문제에 개입해 놓고도 결정 내용에 대해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갈라먹기식 위원 구성이 곧 방송위의 전문성 결여와 정치권 눈치보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현행 9명으로 구성된 방송위 위원은 대통령 3명, 국회 3명, 국회 상임위(문화관광위) 3명씩 나누어 추천한다. 이 과정에서 전문성보다 집권층의 의도와 정당간의 나눠먹기가 주요 인선기준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 방송위원 중 법률과 행정 전문가는 없으며 방송 전문가도 손꼽을 정도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임명된 ‘비전문’ 방송위원들이 위성방송의 출범이나 방송과 통신의 융합 등 급변하는 21세기 미디어 상황을 예측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당사자간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지상파 재전송 논란도 법리적 해석으로 맞서야 하는데도 방송위가 섣불리 결론을 내렸다가 망신을 자초한 셈이다. 방송위가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5명의 위원 중 4명이 통상 및 독점문제 등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이다.

김 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하기에 앞서 나형수 방송위 사무총장이 사표를 낸 것도 방송위원들의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하는 압박용이었다. 나 총장은 사표를 내면서 “할 일이 태산 같은데도 현재 방송위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인적 쇄신을 요구했다. 사무총장은 방송위 사무국을 총괄하는 자리로 나 총장의 사표는 방송위 사무국의 위원회에 대한 불신임을 표출한 것이었다.

방송위 구성문제와 함께 방송위 사무국 직원들의 전문성 문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방송위 사무국은 지상파를 비롯해 케이블, 위성방송 등 방송사의 허가(승인)나 각종 규제 등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성과 책임이 요구된다. 그러나 일선 방송사들은 방송위 사무국 직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방송위는 2000년 재출범하면서 구 종합유선방송위원회와 방송위원회의 인력을 거의 그대로 흡수하면서 행정과 정책권을 가진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방송계와 관련학계에서는 방송위원 구성 방식의 개선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한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추천인단에서 후보를 추천한 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방송을 정권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정치권이 이런 방식을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현재의 방송위 구성에 참여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모두 방송위 문제로 인한 방송계의 혼란 해결보다는 당장 11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에 방송을 활용하거나, 역으로 편파방송으로 인한 손해를 피하려는 데만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방송학자는 “방송위가 정치권에 휘둘리면서 방송 현장 곳곳의 작은 외풍에도 쉽게 흔들리고 있다”며 “책임과 전문성을 갖춘 방송위를 만들기 위한 전면적인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