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가 20일 미국의 스크린쿼터(한국 영화 의무상영일수) 축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영화계가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영화계 인사들은 “모처럼 호황으로 한국 영화가 자생기반을 마련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하면 영화계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화인들과 문화관광부는 “영화정책 주무부서도 아닌 재경부가 영화배급사와 극장주측의 입장료 수입 배분 갈등을 이용해 스크린쿼터제를 흔들려는 것은 월권”이라고 주장했다.
▽영화 제작·배급업계 반발〓영화 제작사들은 “영화는 경제 상품이 아니라 민족정체성과 밀접한 문화산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스크린쿼터 축소 논의는 성급하다”는 입장이다. 스크린쿼터 사수의 선봉에 서 있는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측은 “스크린쿼터의 경우 국제통상법상 문제가 없는 제도인데도 불구하고 주무부처(문화관광부)도 아닌 재경부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불쾌하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측은 빠른 시일 내에 영화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공식 대응에 나설 방침이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의 양기환 사무처장은 “한국 영화가 이만큼 자리잡은 것은 스크린쿼터제 덕분이며 외국에서도 한국의 성공사례를 연구하고 있다”면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면 한국 영화는 또다시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 사무처장은 또 “여론조사에서 스크린쿼터제를 지지한다는 사람이 60%에 이를 만큼 이 제도 존속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영화 입장료 수입 배분비율(부율) 재조정 문제로 극장주측과 갈등을 빚고 있는 영화제작자측은 이 문제와 스크린쿼터 문제를 별개로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현재 극장과 배급사는 외국영화의 경우 입장료를 4 대 6으로, 한국 영화는 5 대 5씩 배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영화제작자협회와 영화인회의가 일방적으로 한국 영화의 입장료 수입도 4 대 6으로 배분하자고 요구했다.
영화제작측은 이 문제와 관련해, “부율 문제를 성급하게 공론화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극장측도 이 문제와 한국 영화의 사활이 걸린 스크린쿼터를 별개로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내 양대 영화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의 경우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네마서비스는 ‘스크린쿼터를 유지하되 한국영화의 경우 극장측에 유리하게 돼 있는 부율도 조정돼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CGV 등 극장 체인을 갖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측은 스크린쿼터나 부율 문제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극장업계의 강수〓서울극장협회는 16일 이사회를 열고 “앞으로 스크린쿼터 폐지를 추진한다”고 결의했다. 이는 ‘스크린쿼터는 유지하되 극장 규모와 극장 소재지의 인구 비율, 제작비 등에 따라 스크린쿼터를 탄력적으로 적용하자’던 기존 주장보다 훨씬 강경해 진 것. 이렇게 입장을 선회한 것은 영화 제작 및 배급사들과의 부율 갈등에 맞서기 위해 ‘스크린쿼터 폐지’라는 강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영화계에서는 극장주측의 이런 입장에 대해 “영화 제작, 배급사들이 ‘일방적으로 부율을 조정하겠다’고 나선 것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에서 터져나온 일인 만큼 부율 조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스크린쿼터 폐지론에서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극장주들도 부율 문제가 폐지론의 발단이 됐음을 시인하는 한편 재경부가 부율 갈등을 스크린쿼터 축소에 이용하려는 것에 대해 당혹해 하고 있다.
▽문화관광부 입장〓문화부는 현행 스크린쿼터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0%를 넘어서긴 했지만 일부 흥행영화의 관객몰이에 따른 것일 뿐 한국영화 전반은 아직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문화부는 재경부 주관으로 스크린쿼터에 관한 부처협의가 열리면 현행 유지 방침을 강하게 주장키로 했다.
문화부는 영화관련 주무부서도 아닌 재경부가 극장업계와 영화제작자측간의 갈등을 이용해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려는 것은 영화산업의 문화적 측면을 도외시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문화부 관계자는 또 “국회에서도 스크린쿼터제 유지를 위해 두차례나 결의안을 채택했다”면서 “재경부가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려 해도 국회의 동의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 현행은 146일로 규정▼
◇스크린쿼터=극장의 한국 영화 상영일수를 법으로 규정한 제도. 1966년 처음 만들어졌다. 현행 영화진흥법에 따르면 모든 극장은 1년의 40%에 해당하는 146일간 한국 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관광부장관이 한국영화 제작편수, 수급상황 등을 고려해 재량으로 20일을 줄여줄 수 있고 영화 성수기 때나 통합전산망 가입시 20일을 또 줄여 주기 때문에 최소 상영일수는 10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