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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칼럼]'部族정치'극복하려면

입력 | 2002-01-23 18:50:00


지금 한국의 통치조직에는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지나간 근 십 년 동안 검찰청과 국세청이 권력의 중심에 서고 그 뒤에 국정원이 도사리고 앉아 힘을 발휘했지만, 그 기관들조차도 모두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온통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불신의 대상이 되고 이제 남은 것은 ‘권력 상층부는 관계없는가’ 하는 의문 하나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두에 김대중 대통령은 검찰이 잘못하여 정부 전체에 화를 입혔다고 언급해 정치관찰자들의 상황 인식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검찰 하나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고 믿는 철부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략적 요직 독차지▼

하지만 대통령의 말이라 무게를 갖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면, 언뜻 요사이 우리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준 한글어휘사전과 대통령어휘사전이라는 두 개의 사전을 놓고 비교해봐야 말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스쳐간다. 표준 사전적인 문맥에서 이해하자면 국정의 난맥상은 분명히 달리 해석된다.

김 대통령은 자신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데 정치생명을 걸었다. 그것은 햇볕정책이었다.

국정의 정책 우선순위에 있어서 첫째도 햇볕, 둘째도 햇볕, 셋째도 햇볕이었다. 그것만 제대로 성사되면 경제적으로도 대박이 터져 다른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은 그의 통치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력 배치는 어떻게 했는가.

그것은 이른바 진보적 개혁세력을 전위대로 하여 특정지역 출신들로 통치에 필요한 모든 전략적 요직을 충원한 일종의 신판 부족정치의 구성이었다.

이 구성은 너무나 엄격하여 남편이 부족원이 아니면 아내라도 부족원이라야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현실로 이어져왔다.

그리하여 사회는 권력 부족과 비권력 부족으로 나누어져 그들간의 관계는 바리케이드 정치라고 할 만한 상황으로 엮여 어느 점령군의 독점적 횡포가 이보다 더하랴 싶은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루되는 부정부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집권 부족의 입장에서 보면 권력작용에 불과한 것을 부정부패로 보는 시각 자체가 내심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검찰이 잘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족 권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개혁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두 개의 사전이 충돌한 것이다.

이리하여 파생된 불신은 권력경쟁 밖에 처한 일반 시민을 위한 연합주의적 정책들도 빛을 잃게 만들었다. 상황은 총체적 불신으로 나타났다.

이런 판국에 그래도 햇볕을 살려 국면전환을 꾀하려는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을 보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 이해된다.

이제 한국정치에 있어서 한 시대의 종말을 우리는 보고 있다.

김대중 정권을 마지막으로 한국정치 세력은 이제 모두가 기득권화한 것이다. 진보도 보수도 정치판에서는 의미가 없어졌다. 누가 낫고 누가 못하고를 따질 여지도 없어졌다. 김대중 정권의 역사적 공적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진다. 이 정권이 좋아한 평준화가 정치에도 결부되어 가히 정치적 기득권 평준화를 이룬 것이다.

모두가 닮은꼴이 되었다. 공격할 기득권 세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총체적 기득권化 벗어나야▼

문제는 여기서부터 어려워진다. 총체적 기득권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현 집권세력의 정권 재창출은 지금까지의 한국정치를 지배한 것으로 불식되어야 할 에스프리(esprit)가 그대로 연장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으로 정치의 발전은 난망한 일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에스프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론처럼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아직도 농경사회의 부족정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구조는 객관적으로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실용적 정치를 밀고 나가야 한다는 요청을 안고 있는 것이다.

분노가 체념에서 냉소로 바뀌어간 민심을 누가 어떤 비전으로 전환하고 그에 따르는 희생을 받아들이게 할 것인지 새로운 에스프리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