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4년 전의 신문을 꺼내본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라는 커다란 표제 아래 ‘40% 선 득표…이회창 후보에 1%P 이상 앞서’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1997년 12월19일자 신문을 통째로 보관하고 있는 이유는 그날의 감격이 너무 가슴 벅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오늘 바로 그 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것은, 김 대통령의 처조카이자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인 이형택씨의 보물발굴사업 로비 의혹과 금품수수 비리를 보도하는 기사들이다.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각종 ‘게이트’에 전 현직 국회의원과 장 차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동생의 부정 의혹으로 검찰총장이 도중 하차하는 사건이 벌어지더니 급기야 대통령의 친인척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부정부패 감시기구 고장▼
사실 대통령이든 고위공직자든, 친인척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이란 당사자 본인의 부정일 따름이다. 대통령이라 해서 별개의 인격체인 한 개인의 사회생활을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일이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다. 혹자는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엄혹한’ 친인척 관리를 하나의 전범이라도 되는 양 떠벌리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일종의 인권유린이었다. 사람을 일개 물건처럼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권력 주변의 친인척을 ‘관리’해 손발을 묶고, 정적의 친인척은 ‘연좌’해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독재시대의 유습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씨 사건을 두고 바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추궁하거나 정부를 근거없이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정녕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이 배경이 된 사건 치고 최고권력자의 행태가 원인(遠因)이 되지 않았던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무릇 권력과 그 주변에는 구설이 따르기 마련이다. 상호 대립되는 가치와 이익들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는 각종 입헌적 장치들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고, 민주사회일수록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의 역할이 강조된다. 이들 시스템의 본질은 상호감시와 견제다.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한다는 점에서는 ‘파파라치’의 역할과 닮아 있다.
그러나 상호감시와 견제장치를 거추장스러운 통과의례로만 생각할 때 비극은 싹튼다. 이씨 사건이나 각종 게이트 연루 의혹 사건의 온상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의 책임이 거론되어야 한다면 바로 이 대목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할 때 국민이 기대한 것은 과거 정권들과의 ‘차별성’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핵심 포스트에 특정 지역 사람들을 집중 배치함으로써 과거 정권의 ‘구태’를 답습했다. 특히 정치적 중립이 강조되어야 할 검찰을 권력을 잡은 쪽의 전리품으로 여겨 편중 인사로 일관한 것이 문제였다. DJ정부는 구태의 답습을 국정운영의 ‘노하우’ 쯤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고 아래에서 김 대통령이 야당 시절 주장하던 인사청문회의 제도화나 특검제의 상설화 등 검찰의 제도 개혁이 물 건너갔던 것은 어쩌면 예상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대신 지연과 학연, 혈연 등 연줄로 연결된 세칭 ‘선이 굵고’ ‘사람 좋은’ 인사들을 선발해 활용했다. 그러다 보니 권력과 그 주변에 대한 비리를 감시하는 기능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틈을 비집고 부정과 부패가 창궐한 것이다.
이명재 신임 검찰총장이 취임사에서 “국민은 검찰이 특정 정파에 유리하게 수사한다고 믿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개탄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특검제의 상설화, 인사청문회의 실시 등 검찰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검찰개혁 용단 내리길▼
사실 따지고 보면 국민이 현 정부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깨어진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국민의 정부마저 민주주의의 원칙이 작동되는 사회를 만드는데 실패했다는 실망감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런 점에서 김 대통령이 15일 반부패 관계 장관회의에서 “검찰이 잘못해 정부가 큰 피해를 보았다”며 검찰을 질책했다는 말은 실망을 넘어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지금 정부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깨어진 약속’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냉소로 바뀌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작심하고 제도 개혁의 초석을 놓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씨 사건이나 각종 비리 사건들도 검찰로 대표되는 사정기능의 ‘고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은 시민단체들의 검찰개혁 요구를 경청해 이를 국정에 반영하는 용단을 보이기를 기대한다.
박성호(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