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한의대, 치대가 마치 블랙홀처럼 우수한 자연계 대학 지망생들을 빨아들이면서 이공계 대학이 우수한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의대 선호와 이공계 대학 신입생의 질 저하 현상은 IMF 사태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올해 대학입시에서는 고교마다 수능시험 10등 이내 자연계열 지망생 가운데 8명 정도가 의학계열로 몰릴 만큼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할 경우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이 크게 후퇴할 것으로 우려된다.》
서울 한성과학고등학교의 경우 올해 수능시험 10등 이내 학생 가운데 8명이 서울대 의대, 경희대 한의대, 연세대 의대, 가톨릭의대, 한양대 의대 등에 합격했거나 지망했고, 단 2명만이 연세대 공대 등 이공계 대학으로 갔다.
한성과학고 심중섭 교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10등 이내 학생 가운데 절반은 이공계 대학에 진학했지만, 올해는 의대 선호가 더 심해졌다”며 “정말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심 교사는 “IMF 사태 이후 기업과 연구소에서 과학기술자들이 많이 해고됐고, 석박사를 해도 교수직이 확실치 않은데다, 최근에는 극심한 취업난까지 겹치면서 직업 전망이 매우 불투명해진 것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대구 경북고등학교의 경우도 수능시험 10등 이내 학생 가운데 8∼9명이 의학계열에 합격했거나 지망했다. 이 학교 권오형 교사는 “지난해 경북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는 경북대 의대보다 수험생 수능시험 성적이 10∼15점 정도 낮았으나, 올해는 격차가 거의 40점으로 벌어졌다”고 말했다. 권 교사는 “몇 년 뒤 의사 과잉이 우려된다고 얘기를 해도 부모의 설득에 따라 막판에 이공계에서 의대로 진로를 바꾸는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대성학원이 진학지도를 위해 만든 배치기준표에 따르면 올해 입시에서 서울공대와 포항공대는 아주대 의대, 경원대 한의예과보다 수능시험점수가 낮았다. 서울대 자연대는 더 떨어져 경희대 치의예과, 동신대 한의예과보다 점수가 낮았다. 전국 40개 의대는 비명문, 지방대 가리지 않고 학생부 석차 4% 이내의 학생이 몰리는 반면,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부는 대학마다 거의 바닥권을 형성하고 있다.
대성학원 이영덕 평가관리실장은 “요즘에는 경북대 의대, 충남대 의대와 서울공대에 중복 합격하는 경우 서울공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에 이를 정도로 의대 선호가 강하다”고 말했다.
우수학생의 이공계대학 기피로 올해 1.39대 1의 저조한 경쟁률을 보인 서울대공대는 중복합격자가 대거 의대로 빠져나가 미달 사태가 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는 지난해부터 1학년에 수학 우열반을 편성하고 방학 중 수학 교육까지 시키고 있다. 이과 기피로 고교에서 수학Ⅱ를 배우지 않은 학생이 많은 데다, 신입생의 질 저하까지 겹쳐 수학 실력이 예전보다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대 이장무 공대학장은 “IMF 사태 이후 외국기업이 국내기업을 합병하면서 연구개발기지가 해외로 이전해 국내 연구원이 갈 곳이 없어졌고, 오랜 임금 인상 투쟁으로 노무직과 엔지니어의 임금 격차가 현격히 줄어든 것이 이공계 기피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달 들어 과학교육발전위원회(위원장 김영환 과학기술부장관)를 구성하고 초중고 과학교육내실화, 과학영재교육, 이공계 대학진학제도, 이공계 대학교육, 청소년 과학화 등 5개 분과별로 중단기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이 위원회는 수학 과학 성적이 우수한 고교생 100명에게 대통령과학장학금을 주고, 우수한 과학고 학생 100명을 선발해 해외에 유학을 보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고교생의 이과 기피를 방지하기 위해 교차 지원을 허용하지 않는 대학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학생과 부모가 과학기술자의 장래를 어둡게 생각하는 마당에 교육정책 만으로 이공계 대학의 질 저하를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학기술부 최재익 기초과학인력국장은 “중국의 경우 장쩌민, 주룽지, 리펑을 비롯해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6명이 이공계 출신”이라며 “우리도 이공계 출신을 정부 고위직에 적극 발탁하고, 과학기술자를 대우하는 사회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