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마인드/실비아 네이사 지음/754쪽 1만8000원 승산
“여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겁내지 않는다.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면 혼자 간다.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잡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에서 말한 ‘위대한 사람(초인·超人)’은 20세기의 위대한 수학자인 존 포브스 내쉬(74)와 딱 맞아떨어진다. 만약 니체가 내쉬에 관한 이 책을 읽었다면 ‘초인’을 흔쾌히 ‘아름다운 정신(A Beautiful Mind)’으로 바꿔 적었을 것이다.
20대에 수 많은 업적을 이룬 수학의 천재, 30대에 찾아온 지독한 정신분열증, 그후 30년간의 자기 분열과 좌절, 그리고 기적적인 회복과 노벨경제학상 수상…. 천당과 지옥을 수 차례나 오갔던 한 인간의 휴먼 드라마는 1998년 뉴욕타임스 기자가 쓴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이 전하는 뭉클한 감동은 능히 할리우드를 움직이고도 남음이 있다. 22일 국내 개봉을 앞둔 화제의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러셀 크로 등 일급 배우들이 빼어난 연기력을 통해서 내쉬의 인간승리를 그리고 있다.
실제 삶은 때로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법. 내쉬가 정신분열증을 극복하는 부분만을 떼어내서 상상력으로 덧칠한 영화에 비해서 이 평전의 감동은 몇 곱절 풍부하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아름다운 정신’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됐지만 3000여명의 눈 밝은 독자가 이 책을 찾았을 뿐이다. 많은 책이 서점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자 출판사는 영화 개봉에 맞춰 최근 제목과 표지를 바꿔 재출간했다.
사실 여느 과학 분야에 비해 수학은 대중에게 덜 매력적이다. ‘신과 접속하는 텔레파시 언어’라는 수학은 상상과 증명을 통해서 우주의 비의(秘意)를 갈파하려는 고독한 작업이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가시적인 학문에 비해서 대중의 이해가 쉽지 않음은 물론이다.
“대학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자연과학 분야는 이론 물리학이다. 펜과 종이, 그리고 휴지통만 있으면 된다. 그보더 더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수학과다. 휴지통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우스개는 수학자들은 머릿속에 자기만의 천체를 만들고 거기에 평생을 영주함을 빗댄 것이다. 유독 수학자들이 광기(狂氣)와 친숙한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내쉬만이 아니라 합성수의 날에는 성행위를 하지 않으려했던 수학자도 있었고, 유나버머로 유명한 우편물 살인범 디어도어 카진스키도 수학 박사 출신이었다.
사실 내쉬는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수업도 안듣고, 책도 보지 않고서 ‘늘 다수의 믿음에 반대하며 스스로 지적 내기를 건’ 괴짜 천재였다. 빈 종이컵을 물고 씹어대기 일쑤였던 그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외톨이’로서 논쟁에서 지면 토라지기 일쑤였다. 따돌림은 천재인 그가 치러야할 대가였다.
그러나 영화는 실제 내쉬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특히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원인이 구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면서 얻은 냉전의 공포로 본 것이 그렇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탁월한 암호 해독가도 아니었으며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도 없다. 유년기부터 당했던 놀림, 아버지의 죽음, 노벨 수학상으로 불리는 필즈 메달을 못받은 열패감, 그리고 한국전쟁에 징병될지 모른다는 불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
영화는 또한 24세부터 5년간 적어도 3명의 남성과 ‘특별한 우정’의 동성애 관계를 가졌고, 4년간 내연의 관계를 맺은 5년 연상의 평범한 간호사를 사생아와 함께 버렸다는 ‘흠’을 할리우드는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MIT에서 만난 평생 동반자인 엘리사와의 낭만적 로맨스 역시 상당 부분 분칠된 것이다.
전후 유럽 석학의 집합소가 된 미국 아카데미의 지적 분위기(3장),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벌어진 동료 연구자들 사이의 우정과 치열한 대결(11장), 학술연구를 반소비에트 군사전략에 직접 응용시킨 랜드 연구소에서 벌어진 권학(權學) 유착(12장) 등은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지적 매력이다.
사르트르는 “천재는 재능이 아니라 절망적인 처지 속에서 만들어지는 돌파구”라고 했다. 일반 독자라도 내쉬가 스스로를 가둬둔 마음의 감옥을 깨뜨리고 나오는 힘겨운 과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서른살을 넘기면서 ‘평화의 왕자’를 자칭하며 각국 대사관에 세계정부를 수립한다며 협조 편지를 보내고, 신문을 통해 외계인이 암호문을 보낸다고 주장하던 그가 온전한 정신을 회복한 데에는 아내 엘리샤의 헌신이 있었다.
저자는 25년이란 시간의 참혹한 유린으로부터 벗어난 그의 삶이 여전히 고요하다고 전한다. 허름한 벽돌집에 보일러와 몇 점의 가구를 새로 들이고, 노벨 경제학상 상금으로 집값 할부금 절반을 미리 갚은 것이 전부라고 한다. “아내가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의 현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익살스럽게 투덜거리며 물건을 살 때는 꼭 아내에게 물어본다.
백발이 되어서야 광명을 본 내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이 사십이 넘어서 새로운 이론을 발표한 수학자는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듯 도시락을 싸들고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에 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연구할게 많다는 생각에 거금을 주고 그의 전집을 출간하겠다는 대학 출판사의 제안도 이미 거절했다.
‘아름다운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상한 두뇌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에 있음을 이 책은 나직하게 증언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힘보다 더 큰 지배력도 더 작은 지배력도 가지 수 없는 존재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을 새겨둘 만하다. 신현용 외 옮김, 원제 ‘A Beautiful Mind’(1998).
윤정훈 기자 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