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규 박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벤처농업인,예술인들
도시인들은 고향을 쉽게 잊고 산다. 문득 흙 냄새가 그리워지는 때가 있지만 농촌과 도시는 세상의 변화 속도만큼이나 멀어져 간다.
도시와 농촌의 만남에선 그래서 고운 향기가 난다. 게다가 위기에 처한 농촌의 회생을 함께 도모하는 진지한 열정까지 녹아 있다면 만남은 더욱 아름답다.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아트센터. 평소 고서와 골동품 묵향이 흐르던 화랑 안에 난데없는 전통주와 떡 한방차 향기가 가득했다. 그림이 걸리고 조각이 설치돼 있어야 할 곳에는 낯선 음식상과 찻상이 차려져 있다.
화랑에 농산물장터가 차려졌나 싶었는데 전통공예품과 현대 공예작품들이 다소 어색하지만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어우러져 있다.
‘농업과 예술.’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찹쌀 야생국화 구기자 등을 섞은 조선의 궁중술 가야곡왕주는 도자기 공예가 박병호씨의 대나무 청자 주기 세트에 담겨 있다. 석류와 밤은 분청그릇에 담겨 있고 장생도라지 한방차는 연꽃 머그에 담겨 양초로 장식됐다.
농산물은 벤처농업인들이 생산한 우수 농산물이고, 예술작품은 이들의 뜻에 공감한 예술가들이 내놓았다.
이름하여 ‘벤처농업과 문화의 만남’.
이 색다른 만남엔 도시와 농촌의 따뜻하고도 오랜 만남이 숨어 있다. 이날의 행사는 지난 수년간의 우정이 엮어낸 하나의 ‘미담’이었다.
‘출품’된 벤처농업 작품들은 1년반 동안 벤처농업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맺은 결실들. 작년 5월 충남 금산의 폐교된 한 초등학교에서 전국에서 모인 농민들이 벤처농업대학을 열었다. 한달에 한번씩 열린 강좌에는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몰려들었다.
황량한 폐교에서의 수업이지만 농촌의 새 활로를 찾으려는 농민들의 의지가 넘쳤다. 그들을 도운 것은 도시에서 온 이들의 지식과 열정이었다. 경영 마케팅 전문가 대학교수 등 각계의 도시인들이 ‘도(都)-농(農)’ 우정의 무대에 합류했다. 도시에서 달려온 초청강사들에게 주어진 보답은 농민들이 제각각 준비한 농산물과 가득한 정(情)이었다.인사동의 전시회가 열리기까지는, 또 벤처농업대학의 성공 뒤에는 한 젊은 연구원의 헌신이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박사(42).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95년부터 경기 화성시의 한 농촌에서 중고 컴퓨터를 갖고 농민정보화 교육을 시작하면서 ‘농업에도 마케팅과 경영기법이 도입돼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강연료와 저서 인세를 모아 농민 250여명을 회원으로 하는 벤처농업포럼(www.va21.com)을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벤처농대도 열었다.
이번 전시회는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 이뤄졌다. 민 박사가 있는 삼성경제연구소가 후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고 가나화랑은 무료로 공간을 제공했다.
도-농의 우정은 점점 ‘동지’를 늘려가고 있다. 전시회는 13일까지.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