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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알면 이긴다(5)]골수이식술 발전 암정복 새지평

입력 | 2002-02-03 17:23:00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의 군의관들은 독일군이 유대인을 집단학살할 때 사용한 신경독성 가스에 대해 연구하던 중 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독성 겨자 가스에 노출된 병사의 피를 뽑아봤더니 알킬화약물이 골수와 림프구의 형성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

이 사실은 즉시 예일대 암센터로 보고됐다. 예일대에서는 이 물질을 통해 특정 백혈병과 림프종 암세포의 형성을 지연시키는데 성공했다. 세계 첫 항암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곧이어 하버드대 시드니 파버 연구소(현 다너 파버 연구소)는 엽산이 특정 백혈병 세포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발견, 엽산유사체로 엽산을 억제하는 암 치료법을 개발했다. 항암제의 초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재 50여개의 항암제가 각종 암을 치료하는데 널리 쓰이고 있고 미국에서만 400여개의 항암제가 임상시험 중이지만 ‘초기 시대’에 항암제는 주로 백혈병 악성림프종 등 혈액암이 타깃이었다.

▽혈액암과 고형암〓암은 크게 백혈병 림프종 만성골수증식증후군 다발성골수종 골수이형성증 등 ‘혈액암’과 위암 폐암 간암 등 장기에서 생기는 ‘고형암’으로 양분되는데 지금까지 암 정복의 역사는 혈액암 분야가 이끌어왔다.

혈액암은 고형암과 달리 혈액을 뽑아 쉽게 병의 진행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약물 반응을 빨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각종 실험에 유리하다.

혈액암 치료 분야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고형암보다 앞서 왔으며 고형암이 생명 연장이나 증상 완화를 목표로 치료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혈액암은 완치가 목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백혈병에 걸린 창백한 여주인공은 대부분 죽는데 ‘지난 시절’의 얘기인 것이다.

▽골수이식법의 등장〓70년대 혈액암 분야에서 획기적 치료법이 등장했다. 바로 현재는 조혈모(造血母)세포 이식이라고 불리는 골수이식이다. 이것은 항암제를 집중 투여해서 피를 거의 말리다시피 하는 방법으로 암세포를 죽인 다음 몸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공여받은 조혈모세포나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깨끗하게 만든 것을 이식하는 것.

1975년 미국 시애틀에서는 폐암으로 숨진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명투수 프레드 허친슨의 형과 팬들이 고인을 기리기 위해 병원을 세웠고 원장으로 당시 워싱턴대 도널 토머스 박사를 초청했다.

토머스 박사는 77년 세계 최초로 골수 이식에 성공했고 이 업적으로 90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치료법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토머스 박사는 상금 35만달러를 모두 병원에 기증해서 병원을 세포 연구의 메카로 키웠다. 병원에서는 골수뿐만 아니라 말초혈액과 탯줄혈액에서 골수와 마찬가지로 혈액세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를 뽑아내 이식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현재 조혈모세포 이식은 세계 각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세계적 테너 호세 카레라스는 림프종에 걸렸다가 이 방법으로 완치된 뒤 매년 미국혈액학회 연례모임 때 공연을 열고 수익금 전액을 암 연구기금으로 내놓는다.

▽미니이식과 글리벡〓지금까지 골수이식은 어느 정도 체력이 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었다. 골수이식은 적전을 초토화한 뒤 아군을 투입하는 상륙작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융단폭격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 시행되고 있는 ‘미니 이식’은 이의 한계점을 극복한 것이다. 이는 항암제를 기존 골수이식 때의 60∼70%만 쓰고 대신 골수제공자의 정맥에서 림프구를 뽑아 환자에게 투여해서 환자의 군대를 원군하는 방법. 지금은 주로 혈액암 치료에만 쓰이지만 고형암 치료에 광범위하게 응용될 전망이다.

또 혈액암 분야의 성과로 지난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만성 골수구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당시 최초의 효과적인 ‘스마트 폭탄’으로 알려졌다. 물론 지금은 이 약 투여시 내성이 발견되는 등 한계가 보고되고 있지만 일부 고형암에 효과적이라는 임상시험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으며 또 미니이식 전후에 글리벡을 투여하면 성공률이 올라간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이밖에 혈액암을 우선 타깃으로 삼은 각종 항암제가 임상시험 중이며 장기 이식 전 조혈모세포를 이식해서 면역거부 반응을 없애려는 방법 등이 세계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의학자들은 혈액암을 치료하는 최신 무기가 고형암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움말〓서울대의대 혈액종양내과 윤성수 교수)

이성주 기자 stein33@donga.com

▼암 Q&A

Q>동생이 백혈병인데 조직적합항원이 맞지 않아 골수를 이식하지 못한다는데 무슨 뜻인가요?

A>혈액에는 아군임을 나타내는 견장과도 같은 ‘조직적합항원’(HLA)이 있으며 이것이 다르면 면역계가 적군으로 생각해서 공격하게 된다. 혈액학자들에 따르면 공여자와 환자의 HLA 6쌍이 완전히 일치할 때 실시하는 ‘동종이식’과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깨끗하게 만든 뒤 다시 넣는 자가이식이 있다. 자가이식은 면역거부반응이 적고 회복도 비교적 빠르지만 암 재발률이 높은 것이 단점이다. 요즘엔 환자가 급하고 ‘동종’을 구할 수 없을 때 HLA 3∼5종이 같고 환자의 상태가 좋다면 ‘이종 이식’도 행한다.

▼백혈병

대표적 혈액암이다. 조혈모세포가 미성숙한 채로 늘어나고 백혈구 적혈구 등 피톨(혈구)을 만들지 못하는데다 정상인 조혈모세포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유독 백혈병 환자가 많은 것은 백혈병에 걸리면 조혈모세포가 붉은피톨(적혈구)를 못 만들어 빈혈이 생기고 얼굴이 창백해져 청순하고 가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몫한다. 백혈병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연령별로 많이 발병하는 것이 다르다. 15세 미만은 급성 림프구 백혈병, 20대는 급성 골수구 백혈병, 30∼60세는 만성 골수구 백혈병, 60대 이후엔 만성 림프구 백혈병이 상대적으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