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1월 30일)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일주일이 넘도록 허둥대며 감정적 대응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야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햇볕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있는 데다 청와대와 정부, 정부와 여당간에도 목소리가 제각각 달라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6일 정치권 일각과 시민단체 등의 ‘지나친 대미 비판’을 비판하며 “반미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뒤늦게 언급한 것은 ‘감정적 대응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해소할 수 없다’는 자각이자 경고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부는 20일 한미정상회담에 여전히 상당한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지나친 낙관론은 금물”이라며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초당적, 전국가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에 대해 ‘섣부른 공방’만 계속 벌일 것이 아니라, ‘차분한 진단’부터 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靑-政 엇박자 -"DJ 韓美동맹 강조 뒤늦음 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6일 재외공관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가진 만찬 자리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테러에 대한 확고한 반대의사도 밝혔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서는 “김 대통령의 발언이 타이밍을 조금 놓친 것 아느냐”며 아쉬워했다. 여당 의원들이 단체로 주한 미국대사관을 항의 방문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중심’을 잡아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전날인 5일까지도 우리 정부의 대미 대응태도는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에 다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던 게 사실이다.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코앞에 두고 주무장관인 한승수(韓昇洙) 외교통상부장관을 전격 경질한 것이나 5일 신임 차관 임명식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상황이 일어났을 때의 엄청난 피해를 생각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 등은 ‘대미용’ 발언으로서의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정부 내에는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대북 인식 차이에 대한 우려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김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헝가리 방문 중 “북한이 9·11테러 발생 이후 반테러 입장을 공표하고, 반테러 국제협약에 추가 가입하는 조치를 취한 것 등이 북-미대화의 조속한 재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런 기대에 대해 ‘북한 정권은 악마’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정부 관계자는 “김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느낀 반면, 부시 공화당 정부는 백 마디 말(words)보다 하나의 행동(deeds)을 더 중시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치권 공방 -여야 '햇볕정책' 놓고 말싸움만…
여야 모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반대’와 ‘지지’만 있을 뿐 ‘분석’과 ‘대책’은 없다. 발언 배경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한반도에 미칠 파장 등을 곰곰이 따져보기보다는 현 정부의 햇볕정책에 미치는 영향만을 놓고 정치 공세를 벌이기에 바쁘다.
민주당은 1일 논평에서 “부시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며 비교적 차분한 대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2일 “현 정부가 대북 퍼주기를 할 때,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열중하고 있었다”며 부시 발언에 사실상 동조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3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는 최근 미국을 방문했을 때 햇볕정책을 비판만 했을 뿐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은 것 아니냐”며 이 총재를 직접 겨냥한 것이 그 예다.
이 총재가 자신의 집권만을 목표로 몸조심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인 셈이다.
여야의 이런 분위기는 4,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회창 총재는 “북한 대량살상무기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부시 대통령의 논조를 이어간 반면,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상임고문은 부시 대통령을 향해 “햇볕정책을 흔들지 말라”고 촉구했다.
한 중견외교관은 이에 대해 “정치권이 부시 발언의 배경을 세계적, 지역적, 한반도적 차원에서 어떻게 보는 지 궁금했는데 그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은 두 연설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일부 소장파나 개혁성향 의원들이 여야를 초월해 이번 사태에 대한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도 감정적인 대미 비판에 치우쳐 있는 측면이 강하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대응 방안 -美정책 냉철히 분석 설득나서야
전문가들과 외교 실무진들은 “책임 있는 정부나 정치권에서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우리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그들의 위치에 서서 면밀히 분석하고 따져보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상대를 알아야 그를 어떻게 설득해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킬지가 보일 것이란 지적이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세계를 ‘문명국가는 동지, 테러지원국가는 적’으로 양분하고 있다”며 “미국이 ‘적’으로 규정한 북한과 우리는 ‘동족’이고, 한미간은 ‘동지’라는 민감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관계 전문가인 김성한(金聖翰)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한반도문제는 이산가족 상봉 같은 남북문제와 북한의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위협 같은 국제적 문제가 섞여 있다”며 “부시 발언에 대한 감정적 대응들은 이를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번 사태의 처방에 대해서는 “미국의 대북 강경책으로 북한이 북-미 대화에 나설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더욱 좁아질 것”이라며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긴밀한 대북 공조 아래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만이 1차적 살 길’임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5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3개 국가에 대한 어떤 새로운 정책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즉 대테러의 큰 전략은 세워졌지만 국가별 전술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인 만큼, 미국의 대테러 전략과 우리의 햇볕정책을 각론에서는 조화롭게 만들 방법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