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는 왕룽(王龍) 일가의 3대 가족사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감동적으로 엮어낸 3부작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1892∼1973·미국)의 따뜻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펄 벅은 사재를 털어 혼혈아동을 위한 복지시설인 ‘소사희망원’을 67년 이곳에 세웠다. ‘작가 펄 벅’에 비해 ‘사회사업가 펄 벅’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사실 그는 이곳에서 몇 달씩 머물기도 하며 왕성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소사희망원은 76년 문을 닫기까지 약 1500명의 혼혈아동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정확한 통계는 남아 있지 않지만 펄벅재단 한국지부에 따르면 1971년 그의 팔순을 맞아 1250명의 원생이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한국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65년 출간된 소설 ‘살아 있는 갈대(Living Reed)’의 집필 작업을 하면서부터. 62년부터 국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항일 민족운동사를 추적,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끈질긴 민족의 생명력을 그려냈다.
이 책 등장 인물의 한 사람인 ‘유일한’은 실제 30년 지우(知友)인 고(故) 유일한(柳一韓) 박사가 모델이다.
펄 벅 여사는 당시 유한양행이 옮겨가게 되자 이곳의 사옥 부지 2만여평을 매입, 소사희망원을 열었다.
그는 73년 사망할 때까지 소사희망원을 방문할 때마다 2, 3개월씩 머물면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히 양재와 미용, 목공 등 직업훈련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본래 입양을 위주로 출범시킨 재단이었지만 혼혈아동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유서를 통해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말하는 등 한국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지금은 소사희망원의 10여개 건물 가운데 2개 동만 남았지만 부천시가 40억원을 들여 이 곳 200평의 부지에 ‘펄벅기념관’을 건립, 2003년 말경 문을 열 계획이다.
한국인으로부터 소외받은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리고 또 하나의 명소로 자리잡게 한다는 것.
펄벅재단 한국지부 김승목 대표(44·목사)는 “이제라도 기념사업이 추진돼 다행이다”며 “혼혈아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닫힌 마음을 열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 때 비로소 그의 정신을 제대로 잇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승철기자 parkk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