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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의 톡톡스크린]할아버지와 손자의 흥행다툼

입력 | 2002-02-07 17:29:00


요즘 충무로에서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흥행 다툼이 화제라죠? 여기서 할아버지는 ‘공공의 적’의 강우석 감독, 손자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이시명 감독입니다.

올해 42세인 강감독이 어떻게 32세인 이감독의 할아버지가 되냐고요?감독들은 보통 자기 밑에서 영화일을 배우는 조감독을 ‘내 새끼’라고 칭하면서 자식처럼 여기는데요, 그렇게 ‘촌수’를 따지면 이감독은 강감독의 손자뻘이 된답니다.

‘마누라 죽이기’를 찍을 때 강감독의 ‘아들’(조감독)은 김상진 감독이었고, 이감독은 당시 조감독이던 김감독 밑에서 일한 연출부 막내급이었으니까요. 이런 인연 때문에 이감독이 첫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데뷔하게 되자, 강감독도 덩달아 “드디어 손자 봤군”하는 축하 인사를 받았지요.

문제는 두 사람의 영화가 모두 설 연휴를 겨냥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점이죠. 이 때문에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첫 시사회가 열리기 전날 이감독은 강감독을 찾아갔답니다. “‘공공의 적’과는 맞붙지 않기를 바랬다”는 손자의 말에 할아버지는 “옛날 이장호감독도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감독과 맞붙었는데 당시 두 영화가 다 잘됐었다”며 “우리도 같이 잘 해보자”고 했다는군요.

현재 ‘공공의 적’과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전국에서 상영관을 각각 160개, 180개씩 확보한 채 흥행 1위의 자리를 놓고 극장마다 ‘전면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맞붙는 경우도 드문데요, ‘할아버지’와 ‘손자’가 맞대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박찬욱 감독과 그 밑에서 연출부 생활을 거친 류승완 감독의 영화가 모두 다음달에 개봉하는 것도 요즘 충무로의 화제거리죠. 평소 류감독을 귀여워했던 박감독은 “우리가 맞붙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네요.

사실, 한솥밥을 먹으면서 일을 시키고 배우던 관계에서 갑자기 경쟁자로 맞붙는 일이 당사자들에겐 부담스럽겠지요. 하지만 충무로에서는 그만큼 감독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바둑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꺾으면 ‘스승의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죠. 바둑 황제 조훈현 9단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바둑을 배웠던 내제자 이창호 9단이 조9단을 처음 꺾고 타이틀을 뺐었을 때도 ‘아름다운 보은’이라고 화제가 됐던 일이 생각납니다.

극장가 최대 대목이라는 설 연휴동안 과연 청출어람한 손자가 ‘은혜’를 갚을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한 수 가르쳐 줄 지 정말 궁금하군요.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