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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명품의 자존심 "특별한 몇분만 모십니다"

입력 | 2002-02-14 14:00:00

테크노 밀레니엄 블랙 다이아몬드 밍크


지난 달 17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조르지오 아르마니 패션쇼에서는 노동자들의 제복에서 아이디어를 본뜬 의상과 10만원대의 청바지 등 ‘어깨 힘’을 뺀 작품들이 선보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디자이너 의상에 열광하는 세계는 잘못돼 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아 대중화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반대로 ‘가치’로도, ‘사치’로도 비쳐지는 희소품이 백화점의 정기세일이나 면세점 이용객에 의해 대중화되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정통 명품파’의 목소리도 높다.

이에 따라 명품 브랜드들은 눈높이를 낮춘 ‘세컨드 브랜드’와 함께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상품’을 개발하는 세분화 마케팅 전략을 쓰고 있다.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는 몇 해 전부터 본격화된 아르마니 블랙라벨, 랄프로렌 퍼플라벨 등 패션 브랜드의 프리미엄 라벨 탄생에 이어 최근 화장품, 시계, 보석에 이르기까지 명품 브랜드들의 최고급 상품이 봇물처럼 출시되거나 국내 상륙을 노리고 있는 점에서 읽을 수 있다.

●소수만 모신다

지춘희씨가 디자인한
투스 아모르의 '카프리치오'

고급 캐주얼 시계 테크노마린은 ‘테크노 밀레니엄 화이트(블랙) 다이아몬드’에 밍크 털로 만든 시계 줄을 덧댄 한정품을 2월 초부터 판매하고 있다. 570만원대임에도 ‘구매 경쟁률’이 높지만 화이트, 블랙 각각 5점씩만 팔고 추가주문은 받지 않을 예정이다.

보석의 경우 한정생산 마케팅을 강화해 주가를 높이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투스 아모르는 지난달 25일 목걸이 신제품 35종을 내놓으면서 30종은 제품별로 3점씩만 출시했다. 특히 디자이너 지춘희씨의 ‘앙상블’ ‘오푸스’ ‘지글루스’ ‘카프리치오’ ‘칸타빌레’ 등 5종은 단 하나씩만 만들어 ‘한 사람만을 위한 맞춤’의 의미를 분명히 했다.

명품 시계브랜드 피아제의 아시아지사는 최고급품인 ‘프로토콜 XL’의 다이얼판에 유명 영화배우 성룡의 이름 로고를 새긴 ‘프로토콜 XL 투 더 스타’를 만들어 성룡에게 증정했다. 이후 같은 제품 주문이 쇄도했지만 ‘특별 주문은 받되 똑같은 제품은 다시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지 않고 있다.

‘손안의 명품’으로 꼽히는 고급 만년필 브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몽블랑은 지난해 말 ‘마담 퐁파두르 펜’을 선보이면서 세계적으로 4810개(몽블랑 산의 높이)만 내놓았다. 250만원대로 보통 몽블랑 펜 값의 8배이며 국내에서는 40개가 판매된다.

몽블랑의 '마담 퐁파두르 펜'

지난해 말 출시된 화장품 브랜드 드 라 메르의 500㎖짜리 크림(150만원대)의 경우 매장에 진열하지 않고 VIP급 손님들의 주문을 받은 뒤 국가별로 몇 개씩만 판매하고 있다.

●국내엔 소개되지 않았지만

명품 브랜드의 최고급 상품의 경우 국내 시장 규모, 거부 반응 등을 고려해 소개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2월 중 출시되는 불가리의 ‘B.zero 1’ 가방 가운데 악어가죽백이 그런 경우다. 대신 5분의 1가격인 데님 소재 가방과 돼지가죽으로 만든 가방은 시판된다. 한편 패션브랜드 버버리를 취급하는 유로통상은 “‘버버리 런던 컬렉션’보다 한 단계 고급화된 브랜드 ‘프로섬 컬렉션(Prorsum Collection)’을 수입할 지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왜 만드나

동덕여대 의상디자인학부 간호섭 교수는 “명품 패션 브랜드들이 대기업화되거나 거대 지주회사에 편입되면서 고도의 마케팅 전략을 본격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은퇴한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위대한 디자이너의 시대는 가고 거대 패션그룹의 시대가 왔다. 순수 패션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가리의 'B.zero1' 악어 가죽백

간 교수는 자동차 마케팅에 비유해 “도요타의 렉서스나 혼다의 아큐라처럼 오리지널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거나 BMW 시리즈처럼 같은 브랜드 내에서 럭셔리 라인을 따로 만드는 등의 마케팅 수법이 더욱 고차원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패션연구소의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명품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 ‘명품족’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며 “브랜드 내에서 저렴한 캐주얼 라인을 만드는 동시에 ‘정통파 명품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마케팅 세분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풀이했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 '명품 위의 명품' 말말말

▽“어떤 물건이나 일을 쉽게 접할 수 있다면 쾌락을 주지 못한다. 쾌락은 사치의 핵심이다. 사치란 여전히 상상력과 꿈이다.” (에어린 로더·화장품회사 에스티로더가(家) 3세, 국제광고 부사장)

▽“사치를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활력을 얻고 활동에 자극을 받는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사치에 관하여’)

▽“내가 갖고 있는 디오르 백을 철없어 보이는 20대 ‘꼬마’가 달랑달랑 들고다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졌어요. 명품은 희소성을 보여주는 거니까. 섣부른 명품족이 따라올 수 없는 뭔가가 있다면 기꺼이 거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어요.” (40대 주부 이진현씨)

▽“명품도 모자라서 ‘명품 속 명품’을 원한다고? 내가 돈이 많았어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됐을까?” (30대 직장인 최진영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