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러브스토리는 “첫사랑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이다. 본인들 입장에서야 자랑거리일지 몰라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콩깍지로 두 눈을 가린 애들 장난일 뿐이어서 하품이 절로 난다.
드라마의 핵심은 갈등이다. 사랑도 한편의 드라마라면 그 감정곡선이 가장 격렬한 진폭을 그리는 것은 실연할 때다. 나는 피투성이의 실연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실연자가 느끼는 정서와 내면풍경들을 가장 잘 포착해내는 감독은 왕자웨이다. 특히 그의 수정주의 무협영화 ‘동사서독(東邪西毒·1994)’은 가히 ‘실연의 제 형태에 대한 임상학적 보고서’라 할만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너나 할것없이 모두 왜곡되거나 결핍된 사랑의 패배자들이다.
린칭샤(임청하)가 연기한 ‘모용연’과 ‘모용언’은 양성(兩性)의 정체성을 모두 갖춘 동일인물이다. ‘모용언’은 ‘황약사’를 그리워하지만 ‘모용연’은 그를 죽이려 한다.
찢겨진 자아에게 남겨진 길이란 무술연마에 몰두하는 것뿐이다. 눈이 멀어가는 검객(양차오위)이 세상을 떠도는 것은 아내인 ‘복사꽃여인’이 자신의 친구였던 ‘황약사’와 정을 통했기 때문이다. 그가 벌이는 무모한 결투는 혹시 자살행위가 아니었을까?
이 세심한 검객은 객잔주인 구양봉(장궈룽·장국영·사진)에게 유언을 남긴다.
“황약사를 만나거든 전해주게, 고향에서 누군가 기다린다고.”
쿨하기 이를 데 없는 구양봉도 마누라를 데리고 다니는 낙천적인 검객 ‘홍칠’(장학우)에게는 문득 질투를 느낀다.
“천하를 얻기 위해선 여자를 버려야 하는 줄 알았어.”
구양봉을 사랑했으나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그의 형수가 되어버린 여인(장만위)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는다.
“내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었죠.”
이 모든 여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분탕질을 쳐댄 ‘황약사’ 역시 가련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맨 그는 이제 ‘취생몽사’라는 술을 마시며 자신을 잊고 싶어할 뿐이다.
이들은 모두 실연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게 상책이다.” 실연자들은 외롭게 죽어간다. 행여 살아남은 자들은 절세의 무공을 갖춘 고수가 된다.
그렇다. 외로움이 고수를 만든다. 갑자기 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그 모든 고수들에 대하여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심산 besmart@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