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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칼럼]최민/'문화盲' 정부

입력 | 2002-02-14 18:11:00


최근 영화제작사들과 극장업자들 사이에 한국영화 입장료 수입 배분비율(부율) 재조정 문제로 불화가 생겨 극장협회 측이 스크린쿼터 폐지론을 들고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절호의 기회인 양 재정경제부는 잽싸게 스크린쿼터를 축소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발표해 물의가 빚어지고 있다.

‘문화주권’을 외치는 영화인들과 지식인들이 경제담당 관료들과 스크린쿼터 문제로 팽팽하게 대립한 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이러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나라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근시안적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경제만 알고 문화 같은 것은 모르기 때문인가. 정권 말기의 다급한 요구에 복종해야 하는 공무원의 특정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스크린쿼터 축소 안될 말▼

더욱이 이 정권은 역대 어떤 정권보다 영화산업의 진흥에 애정을 갖고 있었던 정권이다. 지난 대선 때 현재의 대통령이 한 공약들을 보면 언제 그런 적이 있었던가 할 정도다.

그런데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영화계 내의 작은 갈등을 틈타 기회주의적으로 스크린쿼터를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이를 버리고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반대급부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뜻 있는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를 지키려고 힘겹게 투쟁해 왔으니 망정이지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여론의 압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미국의 요구에 즉각 굴복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굴욕외교’라는 낡아빠진 단어, 심지어 ‘매판’이라는 고약한 단어까지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국의 정치가와 고위 관료들은 왜 그렇게 미국에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미국 ‘당국’(‘당국’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에 밉보이면 신상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미국이 가장 힘센 나라니까 무조건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는 것일까. 아니면 미국문화가 가장 선진적이며 보편적인 문화이므로 이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 필연적인 추세이며, 모든 나라가 다 이를 따르는데 굳이 우리만 버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인가. 미국 영화도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훌륭한 것들이 많으니 그것을 사서 즐기면 됐지 굳이 ‘촌스러운’ 한국영화 따위를 만들어 보았자 승산이 있겠나 하고 부끄럽게 여겨서인가.

이런 사람들 귀에 ‘문화정체성’이니 ‘문화다양성’이니 설명해 보았자 공염불일 것 같다.

미국의 공세에 맞서 프랑스 및 유럽연합 국가들이 내세우는 ‘문화적 예외’(관세무역일반협정부터 세계무역기구에 이르기까지 국제통상 협상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영화를 비롯한 시청각물은 각국의 문화적 특성 및 정체성과 직결된 것이므로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해서는 안되고 예외조항으로 특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와 같은 것은 아예 신성한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불합리한 개념으로 간주할 터이니까. 나만의 지레짐작일까.

나 같은 ‘문화주권론자’가 보기엔 오늘의 ‘한국 문화’, 즉 ‘문화로서의 한국’은 미국 대중문화의 변두리에 불과하다.

동두천과 이태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울 강남을 비롯한 전 국토가 그렇다. 미국 문화의 변방, 또는 준 식민지라고 말해도 이를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 문화의 종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문화적 독립, 즉 ‘문화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주권 포기할 셈인가▼

이런 점에서 스크린쿼터, 즉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는 실제적 필요성만이 아니라 특별한 상징적 의미도 지닌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정세를 보면 한국이 정말 독립국인지 자꾸 의심이 간다. 나 자신 맛이 아주 간 것 같다.

이런 판에 스크린쿼터 따위에 집착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올 때 선물로 주어버리고 말지. 그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자는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교과서를 영어로 고치자고 외치고, 나아가 미국의 오십 몇 번째인가 하는 한 주로 편입시켜 달라는 청원운동을 벌이는 것이 더 솔직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아프가니스탄을 순식간에 초토화시키듯이 미국이 첨단 고성능 폭탄을 쏟아 부어 북한 정권을 전격적으로 궤멸시키면 통일도 거저 되는데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대한민국 백성들도 여럿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