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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질서 신문명]中 런민대 장리원 교수

입력 | 2002-02-17 17:42:00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최근 동서문화의 융합을 지향하는 ‘화합학(和合學)’을 제기해 중국문화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장리원(張立文·67) 런민(人民)대 교수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전통철학의 현대화, 세계 및 동아시아 문화의 화합 등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대담은 계명대 홍원식 교수가 맡았다.

인터뷰 전문은 동아일보 인터넷신문인 동아닷컴(www.donga.com)에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말 ‘유교자본주의론’, ‘아시아적 가치’ 등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이 성행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불확실성 속에서 21세기를 맞을 때 동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도리어 희망으로 21세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열기도 조금 가라앉은 듯합니다.

“20세기 말 동아시아의 비약적 경제발전에 주목하며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유교문화 전통에서 찾는 유교자본주의론이 제기됐습니다. 유교가 자본주의나 근대화에 방해가 된다는 종래의 부정적 생각에서 이제 긍정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울러 서양의 학자들은 서양 근대의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생태, 도덕 및 공동체 위기가 발생하자 동양의 정신과 문화전통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일시적으로 다시 유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전통이란 것은 긍정과 부정, 그 어느 하나의 극단으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통은 끊임없이 비판되고 재해석되면서 오늘에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의 전통적인 것은 바로 현대적인 것입니다.”

-5·4 신문화운동 이후 1960, 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유학이 또다시 크게 비판받으면서, 유학은 이제 중국 역사나 인민들의 마음으로부터 사실상 사라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개혁 개방의 시대를 맞으면서 유학이 재평가 재해석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0세기에 중국은 유학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학은 수천 년 동안 인민의 사상과 행위, 그리고 일상 생활에 파고들어 있습니다. 마치 사람의 그림자처럼,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문화대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이 극복되면서 유학도 점차 제자리를 되찾으면서 다시 중시되고 있습니다.

유학이 이렇게 다시 주목받는 원인을 따져 보면, 먼저 유학은 자체의 학문적 특성상 안정과 단결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바로 지금 중국 대중의 요구에 부합합니다. 중국의 지식인들도 정부도 이제 경제를 건설하고 새로운 도덕을 세우는 데 안정과 단결의 환경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유학은 이런 사회적 배경과 요구에 힘입어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갈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중국 학자 가운데서도 일찍부터 한국 유학에 관심을 두셔서 특히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에 대해 많은 논문과 저술을 남기셨습니다. 퇴계철학의 철학사적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퇴계 선생은 공자와 맹자를 이은 주자학을 조선에 다시 밝힌 분으로, 동아시아 철학사에 있어서 탁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주자학과 조선 사회의 현실을 서로 결합시키고 인간의 도덕심성과 관계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전개하면서 주자학 이론을 풍부하게 발전시키고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윤리도덕과 정신가치를 제시했습니다. 퇴계학은 한국 전통문화 중 가장 찬란한 보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함에 따라 퇴계학 연구도 마땅히 현대사회와 긴밀하게 연계돼야 합니다. 퇴계학 속에는 인문정신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퇴계학은 오늘날 제기되는 각종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훌륭한 이론적 해답을 줄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전통 철학에 대한 풍부한 연구를 바탕으로 ‘화합학’을 내놓아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중국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발표대회에서도 교수님의 화합학에 대한 발표 토론이 관심을 모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저서인 ‘화합학개론’(1996)을 통해 전 지구적 관점에서 21세기 인류의 바람직한 문화전략에 대한 구상을 밝혔습니다. 21세기 인류가 직면하게 될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정신, 그리고 서로 다른 문명들간의 5대 충돌과 그에 따른 생태, 사회, 도덕, 정신, 가치의 5대 위기를 이야기한 뒤 저의 화합학에 따른 화생(和生), 화처(和處), 화립(和立), 화달(和達), 화애(和愛)의 다섯 중심가치로 이를 화해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화합’의 원리는 중국 전통철학에서 제가 새롭게 해석해 낸 것으로, 21세기에 지고(至高), 지선(至善), 지미(至美)의 문화적 선택이 될 것입니다. 화합학은 ‘무조건적인 하나됨(同而不和·동이불화)’을 거부하고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됨(和而不同·화이부동)’을 중시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사건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지만, 그동안 미국과 미국인이 보여준 행보는 저로 하여금 ‘과연 미국에도 지성인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해줍니다. 어떤 이들은 지난 세기부터 ‘예언’됐던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권간의 충돌이 현실화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화합학은 어떠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9·11 사건과 함께 21세기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기독교와 이슬람교간의 충돌만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원한으로 원한을 푸는 미국의 방법으로는 테러활동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은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 종교, 제도 등이 똑같이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하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는 죽고 나만 살겠다는 입장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이어가는 생생불식(生生不息)의 입장으로 전환하고, 투쟁만이 절대적 방법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합니다. 이원적 대립의 냉전적 사유로부터 융합하고 화합하는 사유로 전환하고, 원한으로써 원한을 푸는 방법을 버리고 덕을 쌓는 이런 전환만이 21세기 인류의 평화와 안전과 부와 발전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화합학입니다.”

-지금 세계인들은 중국의 비약적 경제 발전과 더불어 정치 군사적 급성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 추구를 상당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등장 이후 세계는 지금 하나의 질서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유럽과 같이 단일 경제권으로 묶여 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는데, 동아시아에서 한중일 삼국이 하나의 체제로 묶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세계 일체화(一體化)의 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다양성과 다원성을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합화를 제안합니다. 다양성이 충돌하면서도 융합하는 세계를 제안합니다. 이런 원칙에 충실하다면 한중일 3국의 화합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3국은 유교문화권라는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저 일본이 지난 역사의 과오를 시인함으로써 좋지 않은 감정을 청산하고, 어떻게든 상대를 성실함으로 대하여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물려받은 ‘화합을 귀하게 여긴다(和爲貴)’는 가르침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화이부동’을 중시하여 다른 사람이나 민족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며, 패권주의를 지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중국의 경제 발전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 및 발전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 안전 및 발전에도 이로울 것입니다.”

정리〓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장리원 교수는 누구인가

장리원(張立文) 교수는 1935년 중국 저장(浙江)성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철학사가 중 한 사람으로 현재 중국 런민(人民)대 철학과에서 박사 및 박사후과정 대학원생을 지도하는 교수로 재직중이며, ‘중국문화와 경제발전 연구소’ 소장 및 국제유교연합회 이사, 중국공자기금회 이사 겸 학술위원 등을 맡고 있다.

그는 1981년 ‘철학논리 구조론’을 제기하여 중국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논리 구조 분석을 진행함으로써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라는 기존의 유물론적 분석틀을 대체했다. 아울러 중국 철학의 개념을 상성(象性), 실성(實性), 허성(虛性)으로 나눠 서양 철학의 개념 분류법과 다른 독자적 분류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1985년 그는 ‘전통학’을 문화학 가운데서 구분해낸 뒤 그 함의, 대상, 방법 및 구조에 대해 명확한 규정과 체계를 밝혀냄으로써 전통학이 독립적 학문 영역이 될 수 있게 했다. 이어 1989년 중국 전통 철학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화합학’을 제기하여 현대 중국철학의 새로운 이론사유 형태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21세기 인류 문화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전문적 학술 저서만도 20여 권에 이르는 정열적 저술가다. 대표적 저서만 해도 ‘주역사상 연구’(1980), ‘주희사상 연구’(1981), ‘송명성리학 연구’(1985), ‘전통학 개론’(1989), ‘중국철학 논리구조론’(1989), ‘신(新)인간학 개론’(1989), ‘중국철학 범주발전사’(천도편·1988, 인도편·1995), ‘주희와 퇴계사상 비교연구’(1995), ‘화합학개론-21세기 문화전략의 구상’(상, 하·1996), ‘이퇴계 사상 연구’(1997), ‘화합과 동아시아 가치’(2001)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편저 또는 공저한 책도 20여 권이 된다.

그는 자신의 폭넓은 학문적 경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는 분투 노력하는 데 있고, 생명은 늘 새로워지는 데 있으므로, 반드시 목표를 확정하여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진 선 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홍원식 계명대 철학과 교수·계간 ‘오늘의 동양사상’ 발행인 겸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