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투자에 입문한 지 7년째인 권모씨(55)는 증권사 지점 직원들에게 ‘기피 대상 1호’로 꼽힌다.
100만원 정도 입금된 계좌를 들고선 하루에도 10여 회씩 매수 주문을 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기 때문. 주식을 일단 사고 나면 주가가 조금만 오르내려도 마주치는 직원마다 붙들고 “팔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전전긍긍한다.
직접 만든 종목 분석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좋은 종목을 추천해 주겠다”며 귀찮게 하는 탓에 다른 손님들도 권씨를 피한다. 권씨에게 이 같은 버릇이 생긴 것은 3년 전 여윳돈 1억원과 집을 담보로 빌린 돈까지 주식으로 날리고 나서부터.
울산의 한 주부는 지난해 남편 몰래 주식투자를 하다가 이혼 직전까지 내몰렸다. 2억원을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매일 객장에 나가느라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이 주부는 주식시장이 문을 닫은 저녁 시간에도 시세판이 눈앞에 떠올라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행동이 달라진 점을 수상히 여긴 남편의 추궁에 주식 투자를 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버렸다.
‘주식 중독자’가 늘고 있다. 주식 중독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생겨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사이버 거래가 확산되면서 폐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이버거래 확산으로 중독자 급증〓최근에는 주식거래 전용 휴대단말기(PDA)가 보급되고 휴대전화를 이용한 거래가 확산되면서 투자자들의 조급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회사원 오모씨(42)는 ‘삑’ 소리와 함께 PDA단말기로 주식정보가 전해지면 점심식사 도중에도 두어 번씩 확인을 한다. 이 때문에 함께 식사하는 동료들로부터 핀잔을 듣곤 하지만 ‘삑’소리가 나면 그냥은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자영업자인 김모씨(35)는 늘 승용차에 만화책을 가득 싣고 다닌다. “하루 종일 컴퓨터로 주식시세를 들여다보다가 장이 끝나고 나면 불안하고 허전해서 무엇이든 봐야한다”는 것. 김씨의 불안은 다음날 오전 9시 시장이 열리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하용현 현대증권 투자클리닉 원장은 “클리닉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잠시도 시황을 챙겨보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한다”고 전했다. 클리닉에서 상담을 받은 현모씨(45)는 “장이 열리지 않는 추석연휴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고 호소했을 정도.
전문가들은 사이버거래 중독 증상으로 △틈만 나면 주식 사이트를 본다 △거래에 몰두하다 중요한 업무나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있다 △거래를 하느라 가족이나 직장 상사에게 거짓말한 적이 있다 등을 꼽는다.
▽심하면 다른 장애로 이어져〓주식 중독증이 심해지면 다른 장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주식중독증 집단의 심리적 특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경희의료원 신경정신과 반건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주식 중독자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 이유 없는 통증을 호소하는가 하면 강박성향 우울증 적대감 공포 편집증 등이 발견됐다.
전문의들은 정신과 질병 가운데 하나인 ‘충동조절장애’로 주식 중독증을 설명한다. 충동조절장애의 대표적인 것은 도박 중독.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고 금단현상이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광주 조선대병원 정신과 박상학 교수는 “주식중독증이 아직 학술용어로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보면 분명히 병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밤낮 없이 주식에 매달리던 주부가 어느 날 갑자기 불면과 불안에 시달리더니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는 바람에 가족의 손에 이끌려 입원한 경우도 있었다.
한 치과의사는 주식에 중독되면서 치료를 뒷전으로 미루다가 마침내 본업과 부업을 바꿔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깡통계좌가 되고 나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 우울증과 알코올로 인한 간 기능 장애를 치료받았다.
▽주식 중독에서 벗어나려면〓치유법은 다른 중독의 경우와 비슷하다. 우선 출발점은 중독임을 자각하는 것. 반건호 교수는 “도박이나 알코올 중독만큼 육체와 정신에 미치는 피해가 심각한데도 주식 중독자들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며 “주식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어떤 형태로든 지장이 생긴다면 중독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론적이긴 하지만 주식을 당장 그만두는 것. 박상학 교수는 “주식 이외의 관심거리를 만들어 주식을 생각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교수는 또 “알코올이나 도박 중독과 마찬가지로 주식 중독도 스스로 조절하는 게 힘들다”면서 “문제점을 인식했다면 전문가를 찾거나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