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국제원유 시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제1의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에 대항해 러시아가 최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유전 개발 및 사업 합리화를 통해 석유시장의 ‘맹주’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
이 같은 두 ‘석유 강대국’의 물밑 전쟁은 세계 경제와 에너지 정책은 물론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전 미국 국무부 국제에너지정책 부보좌관이었던 에드워드 모스가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최신호(3∼4월호)에 실린 기고문에서 주장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중동 산유국의 맹주를 자처해온 사우디는 하루 750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해 세계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사우디는 이와 함께 하루 300만 배럴에 이르는 여유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국제 석유시장의 가격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사우디는 생산시설 투자 및 기술 도입 등을 소홀히 해 지난 20년 동안 석유 생산량이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반면 러시아의 석유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90년대 중반에 비해 요즘은 하루 200만 배럴 이상 증산하고 있다. 러시아는 98년 경제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과 석유 생산 및 배송 인프라 구축, 해외 기술과 자본 도입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를 발판으로 러시아는 세계 제1의 석유생산국이었던 구 소련 시절의 영화를 급속히 되찾고 있다.
러시아는 비축량 500억 배럴가량의 유전을 새로 개발하는 등 2006년까지 하루 200만 배럴을 추가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러시아의 석유 수출량은 사우디와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OPEC과 러시아는 석유 감산 규모를 두고 지난해 가을 한 차례 격돌한 바 있다. 사우디는 석유 가격을 올리기 위해 역외 산유국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으나 유독 러시아만이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대립의 이면에는 러시아의 자신감과 러시아가 증산을 통해 부당하게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생각하는 중동 산유국들의 피해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선대인기자 eodls@donga.com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사우디정권 옹호-원유 低價수입’▼
세계 최대 석유수출국으로서 미국의 대 중동 및 에너지정책에 핵심 지렛대 역할을 해온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상이 러시아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있다.
사우디는 그동안 국제원유가보다 배럴당 1달러가량 싼 가격으로 미국 국내 석유소비량의 17%(약 하루 170만배럴)가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왔다. 이로 인해 미국은 연간 6200억달러(약 806조원)의 막대한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미국은 대신 사우디에 군사 보호막을 제공하고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사우디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해왔다.
그러나 9·11테러범들 대다수가 사우디 출신으로 확인되면서 미국과 사우디 간의 공조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사우디는 대테러전쟁 지원에 미온적이었고, 미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서 미국은 점차 사우디를 대신할 석유의 안정적 공급원으로서 러시아에 눈을 돌리고 있다. 러시아의 부상으로 미국의 에너지 및 대중동정책의 선택 폭이 넓어진 것. 빌 클린턴 전 행정부의 카스피해지역 에너지특사였던 얀 칼리키는 “미국의 에너지 및 안보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러시아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부상은 국제무대에서 사우디 등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의 역할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사우디는 그동안 하루 300만배럴에 이르는 여유생산능력을 군사력에서 ‘핵무기’처럼 활용하며 국제무대에서 ‘몸값’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가격통제 능력은 러시아의 증산으로 효과가 반감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사우디 간의 계속되는 경쟁이 석유 가격 하락을 부추겨 세계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선대인기자 eodls@donga.com
▼“석유시장 러시아 변수 국제 정치역학에 영향”▼
삼성경제연구소의 중동지역 담당 오승구(吳承九) 수석연구원은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 등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주도해온 국제원유시장에 강력한 ‘러시아 변수’가 등장함으로써 세계경제와 국제정치 역학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오 연구원은 “미국이 9·11테러 이후 아랍권과의 미묘한 관계 등을 의식해 당장 사우디를 축으로 한 중동정책에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 연구원은 “러시아는 작년 표면적으로는 OPEC의 원유감산 계획에 동참한다고 했지만 비밀리에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려졌다”며 “앞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 연구원은 “한국으로서는 장기적으로 수입처 다변화와 유가 안정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