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경기에 자메이카팀이 출전했다. 봅슬레이는 구불구불한 얼음코스를 썰매를 타고 쏜살같이 달리는 경기다. 자메이카는 눈과 얼음이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열사(熱沙)의 나라다. 게다가 온통 백인 천지인 동계올림픽에 새까만 피부의 선수들이 고물썰매를 끌고 나타났으니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이들은 경기도중 썰매가 부서지는 바람에 28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영화로 제작돼 세계에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바로 ‘쿨 러닝(Cool Running)’이다.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흑인 파워는 놀랍다. 특히 미국 스포츠는 흑인들의 잔치마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흑인들도 유독 수영 테니스 골프 등에선 빛을 내지 못한다. 올림픽 수영경기에 흑인선수가 미국대표로 나선 것은 2년 전 시드니올림픽이 처음이다. 윌리엄스 자매가 휘젓기 전만 해도 테니스 역시 백인들의 독무대였고 타이거 우즈를 빼면 골프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돈에 있다. 다른 경기는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배울 수 있지만 수영 테니스 골프는 비용이 많이 들어 상대적으로 가난한 흑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가 하면 흑백차별을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다. 하긴 흑인은 수영장에 아예 들어가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지 않는가.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인의 전유물은 역시 동계올림픽이다. 흑인들이 판치는 하계올림픽과 달리 동계올림픽은 철저하게 백인 위주, 선진국 중심으로 치러진다. 4년 전 나가노대회까지 18차례나 동계올림픽을 치르는 동안 흑인 금메달리스트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인조링크가 개발돼 요즘은 더운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겨울스포츠를 할 수 있다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지을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또 장비도 엄청나게 비싸 봅슬레이 한 대 값만 해도 4500만원이나 한다. ‘하계올림픽은 빈자(貧者) 올림픽, 동계올림픽은 부자 올림픽’이란 말은 이래서 나왔다.
▷그러기에 이번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 흑인여자선수 보네타 플라워스는 신화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그는 육상선수로 한차례 좌절을 겪은 뒤 동계종목으로 바꿨다고 한다. 더구나 200명이 넘는 미국 선수단 가운데 유일한 흑인선수였다니 그 기쁨이 오죽 클까. 그가 출전한 경기 또한 ‘쿨 러닝’의 주인공처럼 봅슬레이라는 점도 공교롭다. 이만 하면 ‘쿨 러닝Ⅱ’ 영화 소재로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