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왕후이중 부주임, 호리우치 아키요시 교수, 조윤제 교수,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
【외환위기 이후 숨가쁘게 진행돼 온 한국의 경제개혁은 외국 석학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한국이 선진 경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까. ‘세계 경제의 기관차’라는 미국 경제는 과연 회복세를 탈 것인가. 또 일본의 엔저 정책으로 조성된 동아시아권의 긴장은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올 4월 공적자금 투입으로 시작될 일본의 금융개혁은 성공할 것인가. 우리 경제를 둘러싼 의문은 하나둘이 아니다. 동아일보는 한국금융연구원 주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미국 일본 중국의 대표적 석학들을 22일 초청해 견해를 들어봤다. 진행은 서강대 조윤제(조윤제) 교수가 맡았다.】
조윤제 ▽조윤제 교수〓한국이 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지 4년이 지났다. 그동안의 구조조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또 한국이 선진경제로 도약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한국 금융이 빠른 속도로 회복한 것을 평가한다. 미국은 80년대 저축대부조합(S&Ls) 문제를 해결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한국의 은행들은 부실채권비율도 떨어지고, 시가총액도 늘어났다. ‘숫자 뒤에 감춰진 비밀’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드러난 성과는 좋다. 반면 기업의 구조조정은 충분치 않은 것 같다.
금융부문에서도 은행 민영화는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민영화한다면 살 사람은 대기업과 외국자본뿐일텐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한국 정부가 맡을 일이다. 한국경제가 세계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은행들이 국내에 진출한 외국은행과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기업이 은행돈을 함부로 주무르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까지 나는 기업이 은행지분을 보유해도 상세한 규정과 엄격한 감독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엔론 사태를 겪으면서 자신이 없어졌다.(웃음) 엔론 사태는 주주가 이사진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미국 시스템 아래에선 ‘정신 차리라’고 하는 ‘웨이크 업 콜’이다.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이 기관투자가가 참여하는 이사회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호리우치 ▽호리우치 아키요시 교수〓일본 관점에서 한국의 빠른 움직임을 진심으로 평가한다. 일본은 한국 사례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아이켄그린 교수의 지적대로 민영화가 늦어지는 것은 문제다. 정부소유 은행 지분을 누구에게 어떻게 나눠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또 한국의 비금융분야는 생산성도 낮고 취약하다. 따라서 건전한 금융시스템이 기업활동을 모니터링하고, 생산성 향상을 감시해야 한다. 한국기업의 지배구조는 아직 손대지 못한 부분이다.
▽조〓(호리우치 교수에게) 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대기업의 참여를 어떻게 보나. 지배구조가 선진화하기 전에는 대기업을 손대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국내에선 ‘대기업에 지분소유는 허락하지만 강력한 감독시스템을 만들자’는 쪽과 ‘대기업은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할 수 있으니 안 된다’는 쪽으로 갈려 있다.
▽호리우치〓일반 투자자가 중요하다.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은 아직 증권시장이 개별기업의 경영능력을 계산해 내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은행 경영을 간섭하는 관행이 없어지면 은행경영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이 틈에 대기업이 정치적 힘을 활용해 은행경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한국은 채권은행이 기업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키워야 한다.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면 소프트론(Soft loan·엄밀한 심사를 거치지 않은 대출)이 늘어날 수 있다.
▽조〓전세계가 미국경제의 회복 가능성과 일본이 제대로 된 금융개혁에 착수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新경제 기적’ 아직 유효▼
아이켄그린 ▽아이켄그린〓미국은 현재 ‘더블 딥(Double Deep·경기침체에서 벗어나려다가 다시 하락하는 현상)’ 여부를 놓고 논란중이다. 최근 수개월 동안 ‘경제가 뒷걸음 칠 것’이란 전망과 달리 주가도 유지되고, 부동산 등 자산가치도 안정된 것을 두고 일각에선 금융당국의 통화팽창 정책 때문이라고 말한다. 돈이 풀리면서 주가나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소비자가 ‘소비 수준’을 유지하면서 경제가 지탱되고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나는 현재 미국경제는 높은 생산성 때문에 회복될 것으로 본다. 지난달 발표된 생산성 지표를 봤더니 노동생산성 등이 다시 올랐다. 신경제(New Economy)가 부른 ‘생산성 기적’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결국 강한 달러정책, 높은 주가 유지등이 가능해 보인다. 미국식 통화정책은 거품이 아니다. 그동안 나는 미국경제를 비관적으로 봤지만 이젠 생각을 바꿨다.
▽호리우치〓일본의 ‘3월 위기설’이 존재하는 마당에 아이켄그린 교수의 낙관론은 일본 국민에겐 반가운 소식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지낸 일본 경제는 미국경제의 회복 여하에 운명을 걸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대형 은행의 부실채권 정리에 과감하지 못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분석이다. 일본 은행의 문제는 10년 불황의 결과물일 뿐 오늘의 경제위기가 은행 때문에 온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기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데 있다. 제조업 분야에선 남보다 먼저 치고 나가는 ‘뉴 프런티어 투자자’가 없다. 또 중국 등 경쟁국의 성장으로 일본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다.
▽조〓하지만 은행 부실화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본다면 일본은 지금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하나.
▽호리우치〓실물부문이 먼저 살아나야 한다. 하지만 미국경제의 빠른 회복이 절실하다. 금융분야에서도 일본 정부는 4월부터 예금전액보호 제도를 폐지한다. 은행고객이 은행의 신뢰도를 따져야 한다는 뜻인 만큼 은행으로선 충격적 조치다. 일부 대형 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이 기준치인 10%에 못 미칠 것이다. 일본 정부가 2000년 5월 법률을 만들어놓고 시행하지 못해온 공적자금 투입을 이제는 결행할 것이다. 몇몇 은행들이 ‘부분 국영화’할 것이다.
▽조〓중국 성장률이 올해 떨어지면서 ‘요소투입 확대, 정부주도 수출’이라는 한국식 성장모델의 한계가 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중국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나.
▼중국 高성장 계속 될 것▼
왕후이중 ▽왕후이중 부주임〓중국은 93년부터 ‘성장의 과열’ 문제를 조절해왔다. 따라서 저(低)성장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중국은 7.3% 성장했다. 현재 중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00달러라는 낮은 수준으로 향후 10년간 연평균 7% 성장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내수시장이 크니까 당장 염려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운 개방’을 요구하는 내부 목소리도 있다.
중국엔 해안지역과 내부지역 간에 큰 소득격차가 있다. 상하이나 광둥(廣東) 지방의 1인당 GDP는 4000달러 선이지만 내륙지방인 구이저우(貴州) 성은 400달러에 그친다. 소득격차가 사회문제인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성장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조〓중국 은행들도 부실채권 문제가 심각하다. 2주 전 중국을 방문했더니 올 3월 정부가 바뀌면서 중요정책은 다음 행정부 이후로 미루자는 의식이 퍼져 있는 등 개혁추진이 느린 것 같은데….
▽왕〓중국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금융구조조정보다 재정적자 문제에 관심이 더 크다. 중국 인민은행의 다이샹룽 총재는 “외환자유화는 국내 금융분야 개혁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본격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켄그린〓환율 전망은 아무도 못하지만 나는 엔화 약세는 유지될 것으로 본다. 10년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이나, 실업률이 높은 유럽이나, 천문학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해결해야 한다는 일부 미국학자들 모두 ‘우리 통화가치를 좀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평가절하에 나선다고 해결이 되나. 미국도 강한 달러정책을 계속할 것 같다. 아시아국가들은 일본이 인위적인 ‘엔화가치 떨어뜨리기’보다는 스스로 금융구조조정에 나서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금융개혁 서둘러야▼
▽호리우치〓내게도 일본 정부는 엔화약세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 부주임께 묻고 싶다. 97년 외환위기 원인(遠因) 중 하나가 빠른 엔화약세로 중국도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려 한국과 동남아국가가 수출을 못해 외환보유고가 줄었다고 보는데…. 중국 시각은 어떤가.
▽왕〓엔화가치는 주변국 수출에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최근 인민은행 총재는 “일본 주변국들이 연쇄적으로 통화약세 경쟁을 벌여선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조〓미국이 일본의 중요성을 감안해 엔화약세를 묵인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치적으로 버거운 일본 국내 금융구조조정보다는 엔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리는 것이 일본 정부로선 부담이 적다. 아시아 국가는 이것을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일본의 엔화약세에 동반해 위안화 가치를 낮출 것이란 우려도 있다.
▽왕〓위안화 평가절하는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다. 내 생각엔 엔화약세가 일본경제를 돕기는 할 것이다.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하지만 일본은 현재 경기침체기를 걷고 있다.
▽조〓한중일 3국에는 지역 경제협력기구가 없다. 일부에선 아시아통화기금(AMF·Asia Monetary Fund)을 만들어 아시아가 스스로 대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아이켄그린〓펀드를 만드는 데는 반대한다. 아시아 국가가 금융분야에서 시스템을 서로 완성시켜 주는 기구 정도면 좋다고 본다. 또 환율을 서로 묶자는 견해도 너무 앞선 것이다. 아시아국가들이 감독시스템을 함께 구축하고, 부족한 부분은 상호압력을 통해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도 국가간 문화, 경제력 차이 등으로 협력수준이 낮은데 앞장서서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나라가 없다. 참여국가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한중일 3국 정도가 모이면 좋겠다.
▽호리우치〓아이켄그린 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한때 일본이 나서서 ‘엔 블록’을 만들자는 쪽도 있었지만 아시아권의 이질성을 고려할 때 적절한 해법은 아니었다고 본다.
정리〓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약력
배리 아이켄그린
△ UC샌타크루즈 경제학과 졸업(74) △ 예일대 경제학 박사(79)
△ 하버드대 경제학과 조교수(80∼86) △ 현 UC 버클리 경제학과 석좌교수(99∼)
호리우치 아키요시
△도쿄대 경제학부 졸업(67) △도쿄대 경제학부 조교수(84)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 (86) △현 도쿄대 경제학부 학장
왕후이중
△ 상하이 지아오통대학 전기공학과 졸업(47)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교수(80) △전국정협위원 △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부주임
진행=조윤제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76)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84)
△ 재무부 장관 자문관(93) △현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