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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은행들 "큰손 고객 크게 모십니다"

입력 | 2002-02-25 18:00:00


직장생활 11년차인 회사원 김모씨(35). 2년 전 분양권을 산 서울 강남지역 주상복합아파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해 왔다. 올해 말 완공을 앞두고 잔금을 붓고 있지만 무리하게 큰 집을 계약하는 바람에 1억원대의 은행 대출금이 부담스럽다. “연말이면 금리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강남지역 아파트 가격이 정점(頂點)에 이르렀으니 분양권을 프리미엄을 받고 팔라”는 조언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부동산이나 금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어쩔 줄 몰라했다.

김씨의 고민을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김씨는 거래하는 H은행 지점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득 수준, 아파트 상황 등을 한참 설명해야 하는데 누가 들어줄지 감감했다. 김씨는 마침 종신보험에 가입해 달라고 전화를 걸어 온 외국계 보험사의 라이프 플래너에게 “조언해 주면 가입하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설명하기에 벅차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김씨는 결국 ‘다른 경로’를 통해 하나은행 프라이빗 뱅킹(PB)팀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굳히게 됐다. 그는 ‘입주 전 매각’을 결심했다.

▽PB는 은행들의 알짜 수익원〓투자상담 전문가들이 비교적 ‘큰손’ 손님들에게 상담해주는 PB 시장을 놓고 은행들이 격돌하고 있다.

한빛은행은 최근 3개월 사이에 서울 강남-경기 분당 지역에만 4곳의 PB지점을 열었다. 조흥은행도 올 하반기 독립지점 개설을 위해 준비중이다. 하나 한미 신한 등 후발은행이 선점했던 PB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선발은행이 뒤늦게 뛰어드는 양상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PB업계의 ‘맏형’은 94년 일찌감치 시작한 하나은행.

PB 업무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 잘 나타나 있다. 살인혐의로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주인공은 혹독한 영어(囹圄)생활을 버티기 위해 교도관들의 투자상담은 물론 절세(節稅)기법, 돈세탁 방식까지 ‘자산관리’를 도맡아 한다. 프라이빗 뱅커는 통장개설 송금 지로납입 등 고객이 요구하는 사항을 실행하는 ‘텔러(Tel-ler)’와는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들이 PB에 뛰어드는 것은 ‘돈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시중 A은행은 내부 자료를 통해 “전체 개인고객 약 1200만명 가운데 예금기준 상위 0.97%가 예금액의 54%를 차지하고, 상위 예금자 10%가 은행수익의 87%를 낸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나은행 김희철 PB지원팀장은 “PB지점은 비싼 임차료, 2억∼5억원대의 인테리어 비용, 최정예 직원의 인건비 등을 고려해도 억대 예금고객을 상대로 한 VIP 마케팅은 분명한 수익원”이라고 말했다.

▽자녀문제까지 상담〓거액예금자 유치경쟁이 치열해지면서 PB의 개념도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푹신한 소파에 고객을 따로 모신 뒤 지점장과 커피를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특권’이나 최고급 인테리어가 갖춰진 사무실에서 거래를 하는 서비스가 차별화한 포인트였던 것이 사실. 그러나 하나은행 김 팀장은 “이제는 시설보다는 고객이 ‘최정예 재테크 전문가가 내 돈을 안정적으로 굴려주고, 세금 부동산은 물론 자녀문제까지 상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진짜 PB”라고 말했다.

한빛은행 김인응 과장은 “부동산 시장이 좋으면 ‘은행 상품을 줄여서라도 부동산 투자를 늘리라’고 조언할 수 있어야 진짜 신뢰가 생긴다”고 말했다.

▽오페라 초대 등 이벤트 경쟁〓‘PB 전쟁’이 이어지면서 은행간 아이디어 싸움은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B은행은 지난해 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정식 공연을 하루 앞두고 B은행 고객만을 위한 예비 공연을 마련했다. B은행 관계자는 “입장권 구입경쟁이 벌어진 뮤지컬을 남들보다 먼저 무료 초대받은 고객들이 ‘특별한 서비스’에 만족했다”고 말했다. 이 행사엔 예금자산이 30억원이 넘는 고객 400명이 대상이 됐다. 한미은행도 올 1월 부산지역 고객만을 위해 저녁식사를 곁들인 ‘성악가 조수미 독창회’를 준비했다. 또 “우리 아들 장가 좀 보내달라”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PB고객 30쌍의 맞선을 주선한 은행도 생겨났다. 내달 초 첫 커플이 혼인할 계획.

물론 “PB 시스템이 ‘부자들의 끼리끼리 문화’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고객이 제값을 내고 서비스를 받고자 하고, 은행도 핵심 고객을 위한 최소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