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애니 '파이널 환타지'
서울 강남구 도곡동 디지털드림스튜디오 사옥 3층. 영화 ‘무사’의 김성수 감독이 10여명의 스태프들 앞에서 뭔가를 화이트보드에 써가며 회의를 하고 있다. 그는 인터넷 온라인 게임으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리니지’를 2003년 개봉 예정으로 영화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성수 감독이 맡은 ‘리니지’는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영화다. 그런데 정작 김 감독은 아날로그 타입이다. ‘무사’는 물론 이전에 연출한 작품 ‘비트’나 ‘태양은 없다’에서도 디지털 세계와 거리가 멀다.
디지털만으로는 영화의 감동 코드를 추출해낼 수 없다는 게 디지털드림스튜디오의 설명. 이 회사의 정광철 제작이사는 “과거 디지털 애니메이션에서는 ‘삐까번쩍’하게 실사같은 그림만 내놓으면 관객이 매료될 것으로 착각했으나 상당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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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런 그림을 바탕으로 아날로그적 감동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김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이유를 밝혔다.
이처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상품은 인간의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귀착되고 있다. 얼마전까지 디지털이 추구해온 ‘탈인간’의 모습이 이제는 ‘인간속으로’로 전환하면서 디지털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아날로그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아날로그로 가는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가수 신승훈의 히트곡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의 뮤직비디오는 클레이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한 전형적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상품이지만 그 속에 내재된 것은 청순한 소녀의 사랑이라는 아날로그 코드다. 신승훈측은 “디지털의 산뜻한 표현 기법을 통해 소녀의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신승훈의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뮤직비디오 ▶
최근 개봉한 국산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도 컴퓨터그래픽으로 제작했지만 3D를 피하고 단색 위주로 잘 채색된 수채화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려 했다. 디지털의 정교한 입체감이 오히려 인간적인 감동을 퇴색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1993년 어설픈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도 감동을 자아냈던 ‘월레스와 그로밋’(닉 파크 감독)의 묵은 감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디지털드림스튜디오가 8월경 개봉을 목표로 제작중인 또 다른 3D애니메이션 ‘아크’는 우위산 감독과 미국의 기획사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를 통해 16차례에 걸쳐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이 회사는 이에대해 “‘인간적인 디지털’로 착각하도록 하기 위해 ‘빠르고 차가운’ 디지털에 ‘느리고 따뜻한’ 아날로그를 덧씌우는 수정을 수차례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3, 4년 사이 전형적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상품인 아케이드 게임(오락실용 게임)은 DDR나 펌프처럼 땀이 나도록 뛰어야 작동하는 헬스기구화했다. 22일 출시한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의 콘솔(비디오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도 ‘몸을 써야 하는’장치가 되어 있을 만큼 인간적 면모에 다가간다.
●딱! 거기까지!
리샤오룽(李小龍)을 디지털배우로 부활시키는 작업을 진행중인 신씨네, ‘아크’를 제작중인 디지털드림스튜디오 등이 사용하는 기술은 영화 ‘파이널판타지’에 쓰인 것보다 3, 4년 더 앞선 기술이다. 디지털 그림으로만 본다면 세계 최고 수준. 그러나 디지털의 수준이 관객의 감동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상품을 만드는 제작자들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최근들어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오히려 어설프거나 매끄럽지 않은 대목을 추가하는 것도 그런 이유. 이를테면 디지털 기술로 인물은 실제 사람에 가깝게 구현하되, 배경이나 기타 사물에는 일부러 어설픈 컴퓨터그래픽을 삽입하고 있다. 디지털로 섬세하게 구현된 인간의 주위에 무지개빛의 나비들이 날아가는 흡사 ‘이발소 그림’같은 풍경도 비친다.
◀ 애니 '마리이야기'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러면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끝은 어디일까? ‘마케팅계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리는 미국의 페이스 팝콘은 오래 사용하면 손때가 타는 특수재질로 만든 PDA처럼 인간적 친근감을 피부로 전해주는 ‘인공노화’ 제품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영화속 주인공과도 쌍방향 대화를 통해 아날로그적 친근감을 느끼거나 게임 캐릭터도 감정이 있어 무리한 요구를 하면 토라지기도 하는 엔터테인먼트 상품이 나올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최혜실교수는 “디지털은 앞으로 아날로그 현실을 계속 확장시켜나갈 것”이라며 “사람들은 결국 숫자(디지털)를 보는 게 아니라 느낌(아날로그)을 즐기는 것인데 디지털은 이를 강화시켜줄 때 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