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12월 19일 당선자 기자회견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통령의 의지와 수범적인 노력을 통해 사회기강을 확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부정부패를 철저히 척결하고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김 대통령은 지난달 대통령 직속으로 부패방지위원회도 출범시켰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아직도 무언가 할 뜻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최근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아태재단 전 현직 관계자들의 ‘이용호 게이트’ 연루 사건들은 그의 부패척결 의지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법보다 권력과 연결된 혈연과 측근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DJ 집권 후 99년부터 최근까지 적발된 7건의 아태재단 관계자들의 비리연루 의혹사실들이 그런 후진적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태재단과 민주당은 이런 비리의혹들이 모두 개인문제라고 우기지만 과연 그럴까. 그들이 아태재단 상임이사나 후원회 사무처장이 아니라도 뇌물이나 공돈을 갖다 주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자금운용-비리의혹 해명해야▼
아태재단 창설주 겸 재단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현직 대통령인데다 재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람 역시 대통령 차남이고 재단 이사들도 DJ의 가신이자 최측근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답변이 될 것이다. 요컨대 서슬 퍼런 권력의 핵심들이 재단을 둘러싸고 ‘결사’호위하는 세력이 될 때 한국적 상황에서 모금은 식은 죽 먹듯이 저절로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재단이 실제로 청와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단기간 내에 많은 액수의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는 대통령이 현직에 있으면서 직접 재단을 운영하는 것과 다름없는 모양새다.
야당 주장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제1야당이 몇 가지 재단 관련 의혹들을 조사, 폭로했으니까 관계 부처와 국세청은 즉각 조사에 착수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우선 재단주인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막연한 의문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국세청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탈세혐의가 없었음에도 단일업종인 언론사에 대해 방대한 인원을 투입, 142일간이나 군사작전식 표적 세무조사를 벌이고 파산할 만큼의 천문학적 세금과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때 아태재단은 왜 세무조사에서 빠졌는가 하는 야당의 거센 항의도 이미 있었다.
국세청은 제1야당이 나름대로 아태재단 비리의혹을 조사 발표했으니까 지체 없이 세무조사에 들어가야 마땅할 것이다. 아태재단은 영어명칭을 ‘The Kim Dae-jung Peace Foundation’으로 정했을 만큼 김 대통령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수렴청정하기 위해 설립했던 일해재단과 닮았다는 인상을 풍긴다.
따라서 아태재단은 후원금 모금방법과 경로, 정확한 모금총액, 불분명한 후원금 사용처, 최근 신축한 재단건물의 총건축비와 조달과정 등을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소상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검찰 등 관계기관은 이유 없이 수사가 미뤄지거나 아예 수사조차 않은 아태재단 관계자들의 비리의혹에 대해 분초를 다퉈 수사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만약 검찰이 권력형비리라면서 뒷걸음치고 나서지 않는다면 특별검사를 임명해서 국민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줘야 한다.
▼국세청-검찰 조사도 필요▼
아태재단 관계자들의 비리의혹을 불식시키는 것만이 김 대통령을 향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다. 또 당선 직후 자신이 기자들에게 다짐했던 성역 없는 부정부패 척결방침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길이 될 것이다. 관계당국은 ‘이용호 게이트’와 연결된 아태재단 관계자들의 비리의혹들을 개인 차원이라면서 미봉하려다 나중에 더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DJ 개인 소유나 다름없는 1400여평의 재단 건물(지하 3층, 지상 5층)을 자신이 제왕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현직 대통령 때 신축한다는 것은 한국적 정치환경 아래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작부터 나돌던 재단 건물 신축문제 등 아태재단을 둘러싼 이런 저런 잡음들은 뭔가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정치 경제적 파장과 회오리를 몰고 올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여영무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