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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홍찬식/소설과 현실

입력 | 2002-02-26 18:27:00


소설 ‘콜렉터’는 영국 문학계의 거장 존 파울스의 데뷔작으로 1963년 발표되자마자 세계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비 채집가인 남자가 나비를 채집하듯 한 여대생을 자기 집 지하실로 납치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줄거리가 충격을 주었다. 이 소설은 ‘벤허’ ‘로마의 휴일’을 만든 영화감독 윌리엄 와일러에 의해 1965년 영화로 제작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사랑과 소유라는, 어쩌면 인간의 해묵은 명제를 다루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심리 묘사와 스토리 전개방식이 탁월하다. 파울스씨는 이 작품으로 일약 영미 문학의 전통을 계승할 소설가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소설을 탐독해온 20대 남자가 술 취한 여자를 서울 지하철역 구내에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설 흉내를 내보고 싶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1994년 국내에 외설 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면서 극중에서 납치된 여배우의 누드 연기를 10여분간 선보였고, 검찰이 외설 혐의로 기소함으로써 문화계 안팎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외국에서는 명작(名作)으로 꼽히는 소설이지만 이번에 모방범죄까지 일어난 것을 보면 우리와는 묘한 악연이 있는 것 같다.

▷문학평론가 김현씨는 소설의 정의에 대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속에는 현실에서 가능 또는 불가능한 여러 욕망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사람이 소설에 탐닉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욕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과 현실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번처럼 소설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일차적으로는 독자에게 있지만 요즘 성행하는 ‘엽기 신드롬’을 보게 되면 또 다른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는 TV를 포함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매체들이 범람하고 있다. 청소년 시절부터 현실과 허구, 옥(玉)과 석(石)을 구분하는 눈을 길러주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장 중요한 가정교육은 날로 실종되고 있다. 한층 심화되어 가는 인간 소외도 문제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은 엽기 신드롬을 확산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이번 사건을 정신 나간 한 사람의 일탈행위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