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사람 박제가는 ‘벽(癖)’이란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돼 치우치는 병을 앓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뭔가에 치우치는 병을 앓는 사람만이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인 기예를 익힐 수 있는 법. 박제가는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백화보(百花譜)’를 그린 김군을 들었다.
김군은 꽃이 좋아 하루종일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꽃 아래에 누워지낸 화가다. 누가 미친놈이라거나 멍청이라고 말해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박제가는 김군이야말로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이,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위인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꽃 시절이 다가오니 김군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에 오른 것인지 알겠다.
꽃에 ‘치우친’ 사람이라면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쓴 강희안도 빼놓을 수 없다. 강희안은 조선 세종 때 사람인데 이 책에는 당시까지 전해온 꽃 키우는 법이 잘 정리돼 있다.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방법, 화분을 배열하는 법 등 사뭇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남쪽 지방 꽃 ‘서향’을 기르는 일은 쉽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서향이 재미없게 쉽게 죽는 꽃이라 여겼는데, 강희안은 공들여 이 꽃을 무성하게 피운 뒤 말했다. “아! 모든 존재는 각각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도 없는 산에서 혼자 피웠다가 지더라도 끝내 알려지지 못하니, 어찌 한스럽고 슬프지 않겠는가.”
우리 시대를 들자면 한국야생화연구소 김태정 박사가 있다. 그는 ‘쉽게 찾는 우리 꽃’, ‘한국 야생화도감’ 등 누군가 꽃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책을 썼다. 그의 글은 한마디로 재미있으면서도 세밀하다. “울릉도의 산에는 섬양지꽃이 자라며, 6∼7월에 꽃이 핀다. 애기양지꽃은 중부 지방 및 북부 지방의 산에서 많이 자라며, 4월에 꽃이 핀다. 제주양지꽃은 제주도의 산과 들에서 많이 자라며, 9월에 꽃이 핀다”, 이런 식이다. 이처럼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도 열심히 불러주는 사람이 있으니 때가 되면 꽃을 피우는 모양이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격물(格物)’의 ‘격’이란 “가장 밑까지 완전히 다 알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쓴 바 있다. 이건 박제가의 ‘벽’과도 통한다.
꽃에 치우친 사람들이 없었다면 금강봄맞이꽃, 처녀치마, 홀아비꽃대 같은 봄꽃들은 이름도 얻지 못했을 테다. 꽃 기다리는 설레임에 이 사람들의 책을 벌써부터 펼쳐드는 즐거움도 거기서 비롯한다.
소설가·출판칼럼니스트larvatus@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