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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제 날개없는 추락]위기대응능력 의문

입력 | 2002-03-01 18:15:00


경기회복과 구조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지난달 27일 ‘의욕적인’ 디플레이션 대책을 발표했다. 은행의 부실채권을 조기에 처리하고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며 추가로 금융완화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 그 골격이다.

그러나 파이낸셜 타임스는 1일 “은행의 부실채권을 처리할 만한 새로운 대책이 거의 없어 고이즈미 내각에 대한 실망만을 확산시킬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27일에는 “일본 국민들은 총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민당과 관료라는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명백한 무능을 보면서 실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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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 타임스의 시각은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을 대변한다.

최근 일본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는 반드시 개혁을 이룰 정치가”라고 치켜세웠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어떤 ‘책임 추궁’도 없었다. 정부 관계자들은이를 두고 “일본에 대한 신뢰의 표시”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전 “불량채권을 조속히 처리하고 불량기업은 시장경제 원리에 맡기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친서를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러면 그렇지”라는 반응들이 나왔다.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아직 40∼50%대를 유지하고 있다. 10개월 전 모리 요시로(森喜朗) 당시 총리의 9%대와 비교하면 아직은 버틸 만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고이즈미 내각조차 위기 대응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내놓은 대책들이 신통치 않은 데다 정부 내에서조차 손발이 맞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실은행에 대한 공적자금투입문제만 하더라도 일본은행총재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금융담당상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러니 “도대체 당신들에게 경제대책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야당의원의 힐난이 나올 수밖에.

일본 정부는 92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긴급’ ‘종합’ ‘신생’이라는 표현이 붙는 대규모 경제대책을 11차례나 발표했다. 그러나 경제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다. 그동안 7명의 총리가 지휘봉을 잡았으나 제대로 된 처방전을 제시하지 못한 셈이다.

위기는 또 있다. 인구감소로 인해 2050년에는 일본 인구가 1억명 이하로 떨어진다. 이는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짐을 의미한다. 2050년엔 또한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35.7%나 된다. 이때가 되면 20세 이상의 생산인구 1.5명이 노인 1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젊은이들은 소위 ‘50년 평화의 잠’에 취해 도전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경제대국을 넘어 정치대국이 되겠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지금의 국가 위상과 영향력을 지키는 것도 버거울 정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가 아무런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 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무당파가 40%를 넘어섰다. 국민이 정치를 버리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일본 역대 내각의 경제대책총리재임기간경제 현황 및 대책무라야마 도미이치94.6∼96.1신용조합 및 주택전문금융 등 금융기관파탄시작. 실업률 3.4%로 10년만에 최악. 다만 휴대전화 등 정보기술(IT)덕분으로 반짝 경기누려 하시모토 류타로96.1∼98.7소비세 5%로 올려 긴축재정. 경제대책보다는 행정개혁에 주력. 그러나 97년 11월 산요증권, 야마이치증권 등 대형금융기관이 연쇄도산하자 공공사업에 16조엔 투입하는 등 팽창예산쪽으로 방향전환. 참의원선거패배로 실각오부치 게이조98.7∼2000.4긴축재정 포기하고 경기대책 중시.부실은행에도 공적자금 대거 투입.모리 요시로2000.4∼2001.4미국의 IT버블붕괴영향으로 주가 하락 가속화. 전임 오부치식 공공사업중시 대책 승계.고이즈미 준이치로2001.4∼긴축재정으로 다시 전환. 경기대책보다 구조개혁선행하며 당내 반발초래. 디플레대책에 중점.

▼"日 파벌 정치구조가 경제개혁 발목 잡아"▼

국민적 인기가 높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조차 말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구조개혁이 난항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고이즈미 총리 개인의 정치력 문제라기보다는 오랜 자민당 지배를 통해 정형화돼 온 일본의 정치구조 문제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의 정치권력은 분산돼 있다. 총리는 집권 자민당의 총재를 겸하고 있지만 인사를 할 때는 아직도 파벌의 눈치를 봐야 한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 시절까지 가능했던 발탁 인사 관행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 이후 총리는 여당의 법안 사전심사를 거쳐야 한다. 인사와 법안제출 양면에서 권력의 집중성이 약화된 것이다.

예산을 배분할 때도 총리는 관료와, 정책전문가를 자처하는 ‘족(族)의원’, 관변 이익단체가 얽혀 있는 ‘하위 정부’의 저항에 직면한다. 안방마님격인 이들의 주장을 외면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이처럼 한 지붕 아래서의 ‘적과의 동침’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공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중간집단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회 대책정치’로 불리는 음성적 물밑거래도 문제이다. 국회에 안건을 상정하기 전에 사전 조율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절차는 반대만을 일삼던 사회당을 잠재우기 위한 ‘떡고물 나눠먹기’ 내지는 ‘야당 길들이기’의 일환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고질병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개혁의 성공을 가늠하는 최대의 변수는 역시 국민적 공감대다.

이케다 총리는 굶주린 시대에 ‘소득배증 계획’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오지주민을 위해 ‘일본열도 개조계획’을 주창해 주목을 받았다. 고이즈미의 ‘성역 없는 구조개혁’도 국민의 기대를 모았지만 경제불황이 지속되는 현실에서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주장이 얼마나 공감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박철희 (朴喆熙·외교안보연구원 교수/ 현대일본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