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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기업공개? NO!…알짜 수백곳 '모르쇠'

입력 | 2002-03-05 17:07:00


대우증권의 정영채 주식인수부장은 기업을 상장시키는 것이 주 업무다. 정 부장은 A기업을 몇 년째 쫓아다니며 기업 공개를 설득하고 있지만 아직 ‘짝사랑’에 그치고 있다. A기업은 공개를 검토하는 듯하다가도 공모가격이 기대보다 낮다느니, 시장여건이 좋지 않다느니 하는 이유를 대며 차일피일 미뤄 정 부장의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것. 그는 매년 몇 차례 A사가 요구하는 컨설팅에 응하거나 각종 정보를 제공하면서 옥동자를 낳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주가가 최근 상승세를 보이자 기업공개를 추진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30개 정도의 기업이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400여 기업이 코스닥시장에 등록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기업공개 요건을 모두 갖추었지만 상장이나 등록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기업도 수백 개에 이른다.

▽기업공개는 남의 일〓B기업 사원 김모씨는 회사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직(移職)을 생각하고 있다. 대기업이며 동종업계 1위인 회사에 입사한 자부심도 사라졌다. 업계 2, 3위인 기업의 직원들이 공개 때 받은 우리사주 덕분에 억대 재산을 갖고 있고 주총 때 높은 배당까지 받아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보면 배가 아프다. 사원들이 모두 기업공개를 원하지만 최고경영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유통업의 대표기업인 롯데백화점은 기업공개에 별 관심이 없다. 자본금이 1000억원인 롯데백화점은 2000사업연도에 4조5504억원의 매출에 1497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당장 큰 자금이 필요하지 않고 신용만으로 저리의 자금을 빌릴 수도 있어 현재로서는 공개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에버랜드는 놀이공원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매출액과 이익 규모가 증가 추세를 보이지만 공개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자본금이 125억원인 에버랜드는 7595억원 매출에 432억원의 순이익을 얻었다.

커피 녹차 등을 주로 판매하는 동서식품과 패스트푸드로 인지도가 높은 롯데리아 등도 기업공개 요건을 갖추고 있으나 공개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동서식품은 6057억원 매출에 552억원의 순이익을, 롯데리아는 3039억원 매출에 206억원의 순이익을 각각 올렸다.

이들 기업은 대체로 현찰 위주의 장사로 자금사정이 좋고 이익이 많이 나는 속칭 ‘알짜’ 회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업종에서 시장점유율 1∼3위를 차지하고 소비자 인지도도 좋다.

외국자본이 참여한 기업 가운데서도 공개하지 않는 곳이 많은 편이다. 10조3573억원 매출에 878억원의 순이익을 낸 LG칼텍스정유, 8442억원 매출에 1927억원의 순이익을 올린 삼성코닝이 대표적이다. 한국IBM 한국바스프 한국오라클 한국휴렛팩커드 텍사스인스트루먼트코리아 소프트뱅크코리아 한국3M 등도 이에 속한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이처럼 공개요건을 갖추고도 상장하지 않는 기업이 2000사업연도 결산 기준으로 625개에 이른다.

▽왜 기업공개를 하지 않는가〓대체로 기업공개는 성장기에 있는 기업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는 것보다는 증시에서 직접 투자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알토란같은 기업들은 “순이익이 많아 돈이 넘쳐나고 있어 굳이 공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이 같은 기업은 대체로 △창업주인 오너가 고령이면서 △경영에 직접 관여하고 있고 △가족 중심의 경영을 하며 △경험이 없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지 않는 등 보수적 성향이 짙은 편이다. 일부 기업의 경영자는 기업공개를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자식을 빼앗기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이규성 증권거래소 상장심사부장은 “기업을 공개하면 소액주주나 감독기관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영자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 외국자본 투자기업은 과실송금 제일주의적인 경영관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소액주주가 있으면 배당률을 맘대로 정하기 어려운 면도 있기 때문에 이들 기업은 공개엔 별 관심이 없다. 주로 다국적기업인 이들 기업은 한국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데다 한국 증시가 선진국에 비해 저평가돼 공모를 하더라도 공모가격이 기대만큼 높지 않아 공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김상철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