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수요프리즘]조기숙/대세론의 함정

입력 | 2002-03-05 17:59:00


컴퓨터 자판이 ㄱ, ㄴ, ㄷ 순으로 배열돼 있다면 타자를 익히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현 컴퓨터 자판이 표준이 된 것은 과거에 사용하던 수동식 타자기 덕분이다. 수동식 타자기는 키의 엉킴을 막기 위해 현재와 같은 자판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컴퓨터에는 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식 자판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용하기에 편리한 신식 자판이 구식을 대체하지 못한 이유는 구식 자판의 대세론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특정 상품이 표준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제품이 다른 것에 비해 성능이 우수한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우연에 의해서다. 우수한 제품이 표준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연에 의해 표준이 된 컴퓨터 자판 같은 제품은 다른 우수한 제품의 시장 진입을 막는다는 점에서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

▼낙선경험이 프리미엄인가▼

정치에서의 대세론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특정후보가 대세론을 타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자금과 사람을 집중시키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순순환이 일어난다. 후보의 탁월한 역량과 비전이 대세론의 근거라면 유권자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난립하는 후보들의 정책과 지도력을 일일이 비교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표준이 된 비효율적인 컴퓨터의 자판처럼 단지 높은 인지도가 대세론의 근거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특히 후보의 높은 인지도가 단지 지난 선거에 출마했던 경력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선거에서 낙마한 경력은 후보 검증에서 한번 실패했음을 의미하므로 후보의 오점은 될지언정 자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선은 차기 선거에서 높은 인지도라는 프리미엄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프리미엄이 대세론의 핵심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근거 없는 대세론은 신진 후보들의 객관적인 검증을 어렵게 함으로써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선거의 공정성에 불만을 품은 후보가 재출마하곤 했던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민주시대의 선거는 달라져야 한다. 대통령은 경로당 노인회장이 아니다. 줄만 먼저 서면 언젠가 당선된다는 선례를 만들기 시작하면 당선 가능성도 없는 후보들이 일단 출마부터 하고 볼 것이다. 이런 식의 출마는 여론을 왜곡시켜 엉뚱한 선거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며, 유권자는 후보를 재탕 삼탕하는 불행을 반복하게 된다.

기존의 컴퓨터 자판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구식이 표준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한 컴퓨터 자판이야 처음에 배우는 수고를 약간만 더 하면 되지만, 대통령은 한번 뽑아 놓으면 그 영향이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된다. 대세론에 휘둘리기보다는 모든 후보의 자질을 꼼꼼히 검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식 자판이 실용화되기 위해서는 임계숫자(critical mass)인 30% 정도의 사용자가 일거에 새 자판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대세론이 근거가 없다면 이를 깨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예”라고 말할 때, 적어도 30%의 유권자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선거인단 중 일반 국민의 비율이 50%에 이른다. 이는 원점에서부터 후보들의 자질을 객관적으로 꼼꼼히 비교한 후 근거 있는 대세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수다.

▼유권자 이성적 선택 중요▼

하지만 한나라당에서는 국민참여 경선의 의미를 살리기 어렵게 되었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박근혜 부총재가 탈당을 선언함으로써 경선 자체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박 부총재의 탈당이 대세론에 맞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는지, 차차기에 자신이 대세론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계산이었는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회창 총재가 대세론에 기대어 적극적인 정당개혁을 뒤로 미룸으로써 박 부총재가 이를 탈당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대세론은 공정한 경쟁을 해침으로써 타 후보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때로는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대세론에 휩쓸리지 말고 독자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도 미국처럼 대선에 실패한 후보는 일단 정치일선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되는 문화를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