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이 광복회가 친일파로 분류한 692명 이외에 논란이 있어온 교육 문화 언론 종교계 인사 16명을 추가한 708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했다. 특히 16명 중에는 1948∼49년 ‘반민특위’ 때도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았던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을 비롯해 계초 방응모(啓礎 方應謨), 김활란(金活蘭), 모윤숙(毛允淑) 선생 등이 포함된 데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인촌을 친일파로 매도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 소련 군정과 공산당이 붉은 정부를 세우기 위해 인촌을 친일파로 비방한 적이 있었다. 이번 친일파 명단을 밝히는 데 참여한 임종석 의원이 전대협 의장이었을 당시인 1989년에는 일부 주사파 학생들이 고려대 교정의 인촌 동상을 철거하려 한 일도 있다.
그때 교우들과 필자는 “인촌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가?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 무슨 의도와 근거로 선생에 대해 친일파라고 떠들어댈 수 있는가? 여러분의 조부모들은 일제 하에서 살아남아 여러분들을 키우면서 인촌을 민족의 구심적 지도자로 숭앙해 마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라며 설득해 학생들의 망동을 막은 일이 있었다.
인촌 선생이나 조선일보 창업자인 계초 선생은 일제 치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사들에 못지않은 억압과 감시를 받아가며 광복과 건국의 날을 위해 애썼다.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고려대학교를 중흥시키며 경성방직을 창업해 민족 자주독립의 역량을 배양했던 인촌 선생을 어찌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인촌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등과 함께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일과 중앙학교 숙직실을 무대로 3·1독립선언을 준비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일제 말기 인촌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선생의 지시로 경성제대의 이혁기(李赫基) 대표와 학병거부운동 비밀조직 활동을 한 일이 있다. 당시 이혁기는 여운형(呂運亨)을 보좌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 고려대 총장이었던 유진오(兪鎭午) 박사의 회고록인 ‘양호기(養虎記)’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 박사는 일제 총독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인촌,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명의로 학병 권유문을 게재한 일이 있는데 이는 명의를 도용한 것이며 따라서 이를 두고 이들을 친일파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도 지적했다.
박헌영(朴憲永) 여운형 등이 해방 후 건준(建準)과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인촌을 문교부 장관으로 각료 명단에 넣어 발표한 일도 있다.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선생을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했던 것이다. 인촌은 건국 후 대한민국의 부통령으로 추대되었고, 사후 국민장까지 치른 분이다.
필자도 제헌국회 때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 척결작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친일파 문제를 이상적으로 마무리짓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미군정의 탓도 있다.
진정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가려내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최대한의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 다음 객관적 자료, 증언, 공정한 심사기준을 바탕으로 한 번에 끝내야 할 일이다.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