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때쯤 일본에서 교과서문제가 불거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양심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한일 두 나라 정상은 지난해 10월 역사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연구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했고, 두나라 정부는 5일 구체적인 구성방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연구성과를 활용하도록 배포한다’, ‘각자의 제도상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공동연구의 목적에 최대한 부합하는 방향으로 연구성과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두 나라 정부는 연구결과의 교과서 반영이라는 핵심쟁점에 대해 난항을 거듭한 끝에 결국 지극히 낮은 수준의 합의를 보는 데 그친 것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공동연구기구의 출발점임을 생각해볼 때 두 나라 정부가 합의한 내용은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연구성과를 교과서에 반영하라는 주장을 해온 한국정부가 단지 ‘활용하도록 배포한다’는 차원에서 합의해준 것은 공동연구의 성과가 ‘반영’도 아니고 ‘병기’도 아닌, 일종의 ‘회람’수준에서 정리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급히 서둘러 합의해 준 데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것이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3월 방한과 올해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공동 개최를 앞두고 두 나라 정상간의 합의를 하루빨리 구체화해야 한다는 정치적 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월드컵대회 공동 개최는 한일 간의 우호친선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이벤트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를 딛고 한일 간의 진정한 공생과 우호관계를 만들기 위한 상호신뢰와 올바른 역사인식의 공유다.
사실 공동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두 나라 정부의 합의에 대해 처음부터 별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과거에도 한일 공동연구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공동연구 역시 잘못하면 과거를 답습하는 임기응변책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공동연구기구 인선과정에서 공개성 투명성 전문성 등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두 나라 정부에 계속 요청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연구기구 인선 결과나 합의내용은 우려했던 대로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을 놓고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또 한번 속는 셈치고 기대를 걸면서 다음의 사항만이라도 지켜주기를 한국 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
첫째, 공동연구기구의 목적 자체가 역사교과서 왜곡 해결에 있는 만큼 연구성과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둘째, 공동연구기구의 인선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참여인사들에 대한 검증절차를 밟아야 하며 조속히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 셋째, 공동연구기구의 연구결과들을 공개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공청회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책임 모면용이나 여론 무마용으로 역사 공동 연구기구가 설치되고 운영된다면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일 양국이 교과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창일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 공동 운영위원장 배재대 교수·한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