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전통음식연구소 한영실 소장과 연구원들
“구절판(九折坂)을 ‘나인 섹션드 디시(nine sectioned dish)’라고 가르쳐 줍니다. 일단 구경하고 먹어 본 외국인들은 ‘나인 트레저 디시(nine treasure dish)’라는 감탄사를 절로 내뱉습니다.” (한영실 교수)
숙명여대 한국전통음식연구소는 요즘 2002월드컵을 앞두고 ‘한 건’을 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전통 한식인 구절판을 세계인들 누구나 따라 만들 수 있게 조리법을 계량화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계량화한 기술력과 포장력, 마케팅을 앞세워 김치와 불고기 대신 ‘기무치’와 ‘야키니쿠’로 세계인들의 입맛을 먼저 길들였던 전례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구절판의 표준화 작업은 ‘작지만 의미있는 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以心傳心 대신 ‘표준’이 필요하다
“한국음식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에게 ‘당근을 가운뎃손가락 크기 만큼 자르세요’라고 주문했더니 사람들마다 크기가 달라지더군요. 한국 요리는 개인교수가 없으면 만들지 못하겠다는 불평도 들었습니다.”
숙명여대 한국전통음식연구소 한영실 소장(식품영양학과 교수)은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을 대상으로 교내에서 강의를 하거나 유네스코 국제교류단에서 외국인 문화사절들을 대상으로 한국음식을 소개하는 때가 많다. 그때마다 구전(口傳)과 손맛으로 요약되는 한국 음식 조리법은 ‘한국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매뉴얼’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춘천 닭갈비 맛은 춘천에서도 다 틀리던데요.” “전주비빔밥 위에 날계란을 얹은 것도 있고 익힌 계란을 얹은 것도 있고, 그냥 계란 없이 육회를 얹은 것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한국 음식의 오리진(origin)은 뭐죠?”
외국인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 교수는 ‘손맛이 많이 개입되니 오히려 창의적이지 않느냐’고 순간을 모면하곤 했지만, 우선 ‘표준 조리법’이 있고 난 다음에 변칙과 응용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됐다.
“물이 많아 ‘진 밥’ 이나 물이 적어 ‘된 밥’은 있지만 ‘된 빵’이나 ‘진 쿠키’는 없죠. 밀가루와 물의 배합, 오븐의 온도에서 조금만 오차가 나도 서양음식은 아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원래 계량화가 절실하지 않았던 한국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구절판의 계량화를 위해 옛 문헌부터 현대의 한국요리 서적까지를 참고했지만 어디에도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었다. 최근의 책들에서도 ‘㎝’와 ‘g’이라는 평범한 표준 단위조차 생략하고 ‘알아서 이해하겠지’라는 이심전심식 설명이 많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중간크기의 무에 숨을 죽이듯 소금을 절인다’는 시적인 표현은 ‘조선요리제법’(1917년)같은 고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요즘의 요리책에서도 흔히 보이는 ‘뭉근하게 졸이고(흐물어지지는 않게 끓이고)’, ‘물을 자작하게 붓고(재료가 잠길 듯 말 듯하게 물을 붓고)’ ‘센 불(그냥 봐서 강한 온도로)’ ‘피망 대여섯개(5, 6개)’등은 ‘수출용’으로는 조금씩 함량 미달인 표현이었다.
▼구절판의 표준조리법▼
분량:340g(4인분) 조리시간:120분
식품
재료
분량
1인분
량(g)
밀전병
밀가루
소금
물
잣
1C
1/4ts
1과 1/4C
4.5개
45
속 내용물
쇠고기
100g
13
마른 표고
20g
5
오이
소금
식용유
290g
1/4ts
1과 1/2T
2.5
당근
소금
식용유
100g
1/4ts
1과 1/2T
5
석이버섯
소금
식용유
20g
1/4ts
1과 1/2T
1.5
숙주
소금
식용유
150g
1/4ts
1과 1/2T
5
달걀
소금
식용유
250g
1/4ts
1과 1/2T
8
고기양념장
간장
설탕
다진파
(흰부분)
다진 마늘
참기름
깨소금
1T
1/2T
1ts
1/2ts
1/4ts
1/4ts
-
겨자장
겨잣가루
물
식초
설탕
2T
1T
1T
1T
-
초장
간장
식초
물
3T
1과 1/2T
1T
-
다행히 숙명여대에는 ‘조리실 족보’라는 것이 있었다. 조선왕조 마지막 상궁이던 한희순 상궁(1889∼1972·무형문화재 38호)이 55년부터 67년까지 조리실습지도를 했고, 이것이 교수들의 강의노트로 전해 내려오게 된 것. 실습 당시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정리된 노트에는 비록 주관적이지만 세부적인 표현이 적혀 있어 원전(原典)으로 삼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계량화된 구절판이 옛 원형에 거의 근접하게 복원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열푸드’이자 ‘패스트푸드’
구절판은 신선로와 함께 조선시대 궁중에서 즐겨 먹던 대표적인 음식이다. 쇠고기 버섯 당근 숙주 달걀 등 8가지 세부 재료를 밀쌈에 싸서 간장이나 쌈장에 찍어 먹는다.
김치는 너무 자극적이고, 불고기는 맛은 있지만 위에 부담을 준다는 약점이 있다. 구절판은 간이 상대적으로 심심하고,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경쟁력’으로 꼽힌다. 세계시장을 적극적으로 의식했기 때문에 김치(Kimchi)처럼 구절판(Gujeolpan)이라는 음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nine sectioned dish’라는 영어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 밖에도 △채소 고기 버섯이 들어간 덕분에 5대 영양소를 한 입에 고르게 섭취할 수 있고 △베트남의 밀쌈이나 멕시코의 화이타, 중국의 춘권과 형식이 비슷해 식습관이 다른여러 민족이 쉽게 친근감을 가질 수 있고 △국물이 많거나 잔반이 많은 여타 한식과는 달리편리식(便利食)이며 △재료의 색 배합이 아름다운 ‘아트 푸드’이고 △왕실에서 먹던 음식이라는 특징을 살려 가격도 고가에 책정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곱씹어 보면 구절판의 세계 시장에서의 잠재력은 상상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게 숙명여대 전통음식연구소측의 예상이다.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백명숙씨가 지난해 6월 낸 석사논문에 따르면, 17개국에서 온 국내 체류 외국 공무원 6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한 결과 82.1%가 “구절판의 맛이 인상적이다”라고 답했으며, 특히 “밀쌈의 조직감이 좋다” “찬합의 모양이 예쁘다”고 답한 사람이 각각 85.9%, 89.5%였다. 54.5%는 “닭고기를 넣으면 더 맛이 좋아질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숙명여대 전통음식연구소는 이미 전주비빔밥의 조리법을 계량화한 바 있다. 빈대떡 잡채 순두부가 앞으로의 목표다. 월드컵 개막을 앞둔 5월 중순경에는 외국 명사들을 초청해 구절판을 포함, ‘글로벌 스탠더드’ 조리법에 맞춘 한식으로 전시회도 가질 예정이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