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끝나고 자막 작업이 들어갈 때면 슬슬 감독과 제작자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어느 배우의 이름을 먼저 넣느냐,는 문제 때문이죠.
배우마다 서로 자기 이름이 먼저 나오길 원하기 때문에 그 순서를 정하는 일이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거든요. 대개는 연기 경력이나 나이보다는 당장의 인기나 지명도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전도연, 이혜영씨가 공동 주연한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면 경력이나 나이로는 이혜영씨가 선배지만 전도연씨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배우들의 인기가 엇비슷할수록 이는 더 민감한 문제가 됩니다. 차승원, 이성재씨가 나왔던 ‘신라의 달밤’의 경우 감독은 고민 끝에 차승원씨 이름이 먼저 넣었지요. 대신 엔딩 크레딧과 광고나 포스터 등 영화 이외의 매체에서는 무조건 이성재씨 이름을 먼저 넣겠다는 조건으로 이성재씨를 달랬다는군요.
두 사람의 이름을 자막에 동시에 넣는 것 역시 골치아프기는 마찬가집니다. 이 경우 눈길이 먼저 가는 왼쪽을 ‘상석(上席)’으로 치기 때문에 누구 이름이 왼쪽에 나오느냐로 신경전이 벌어지니까요.
그 예로 전지현, 차태현씨가 주연했던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전지현씨가 왼쪽을 차지했죠. 포스터 카피에서도 ‘전지현과 차태현의…’하는 식으로 전지현 이름이 먼저였고요. 그러자 이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왜 태현오빠가 전지현보다 뒤에 나오냐”는 ‘오빠 부대’의 항의가 수백건씩 올라와 영화사가 한동안 곤욕을 치뤘습니다.
스타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걸려있는 사안이다보니 할리우드에서는 아예 계약 조건에 이름 순서를 명시할 정돕니다.
화려한 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화제가 된 영화 ‘오션스 일레븐’의 경우 영화 포스터의 이름 순서 역시 이런 계약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요. 포스터에는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앤디 가르시아, 브래드 피트, 줄리아 로버츠 순으로 적혀있는데요, 이와 함께 ‘알파벳 순서임’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놓았으니까요.
얼마전 ‘아이리스’와 ‘존 큐’의 시사회에 갔다가 크레딧 순서를 살펴봤지요. 여기서도 고뇌의 흔적(?)이 엿보이더군요. 두 영화 모두 시작할 때 크레딧 없이 엔딩 크레딧만 나가는데요, ‘Cast In Order Of Appearance (출연자-등장한 순서대로)’로 돼 있더군요. 음. 이것도 꽤 공평한 방법이죠?
하지만 저는 무조건 ‘가나다순’이 좋습니다. 왜냐고요? 성이 ‘강’씨잖아요! 웬만해선 내 이름 보다 앞설 순 없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