素 封(소봉)
素-흴 소 封-봉할 봉 疏-뚫을 소 殖-불어날 식 閥-벌열 벌 祿-복 록
중국인의 뿌리깊은 觀念(관념) 중에 ‘地大物博’(지대물박)이란 것이 있다. ‘땅은 넓고 물산은 풍부하다’는 뜻인데 이것이 좀 심하게 되면 ‘땅이 넓어 없는 것이 없다’라는 國粹主義(국수주의)로 발전하게 되며, 다시 이것이 문화적인 優越感(우월감)과 결합하면 배타적인 中華主義(중화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淸(청)의 乾隆(건륭·1736∼1796)이라면 중국 역사상 국력을 최고로 이끌었던 제왕이다. 우리의 조선 英 正朝(영 정조)에 해당된다. 그러니 그는 속된 표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1773년 대영 제국의 매카트니卿(경)이 通商(통상)을 위해 乾隆을 알현했다. 한참이나 무표정하게 듣고 난 乾隆의 대답은 간단했다.
‘地大物博!’
한 마디로,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는 뜻이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있었으므로 자급자족이 가능했는데 문제는 물자의 원활한 ‘疏通‘(소통)이었다. 땅이 넓다 보니 있어도 실어 나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일례로 廣東(광동)의 생선은 내륙인 四川(사천)까지 갈 수가 없었으며 四川의 비단이 廣東까지 가자면 2년은 족히 걸렸다. 楊貴妃(양귀비)가 廣東의 ‘~枝‘(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玄宗(현종)의 특명으로 특별 수송팀이 구성되었던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달려도 長安(장안)까지는 보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없는 것(無)이 두려운 게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不均)이 더 두렵다‘고 했다. 고르게 하는 것이 지금말로 ‘流通(유통)’이며 그것을 맡은 사람이 곧 ‘商人(상인)’이 아닌가.
商業(상업)과 商人의 중요성을 간파했던 인물이 바로 司馬遷(사마천)이었다. 그는 ‘史記(사기)’에 특별히 貨殖列傳(화식열전)을 두어 그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가난을 벗고 부자가 되는 길은 장사가 최고다.’ ‘방안에서 수를 놓기보다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라!’ ‘못이 깊어야 물고기가 있고 산이 깊어야 짐승이 살 듯 사람은 부유해야 仁義가 따른다.’
財閥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사실이지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부터 財閥(재벌)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들을 ‘素封’이라고 표현했다. 素는 본디 ‘흰 비단’으로 흰색은 아무런 색도 입히지 않은 것이므로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諸侯(제후)나 大夫(대부)처럼 封土나 俸祿(봉록)은 없지만 부유함은 그들 못지 않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 중국문화 sw478@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