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거칠게 말한다면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는 ‘혁명’과 ‘반혁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이란 기존의 정치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대대적 개혁을 의미하고, 반혁명이란 기성 정치질서를 지키기 위한 수구적 저항을 뜻한다.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 민주당은 1월 초 1인 보스 체제 하에서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당을 개혁하기 위해 깜짝 놀랄 만한 개혁 프로그램들을 제시했다. 국민경선제의 실시, 총재직 폐지, 집단지도체제의 도입, 당권과 대권의 분리 등을 통해 민주당을 현대화·민주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민주당의 이러한 변신은 야당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이 제시한 개혁 어젠다 중 국민경선제를 도입해 상향식 공천을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국민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집단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개혁도 적절한 시기에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금품…동원…경선 구태 조짐▼
이때까지만 해도 국민이 염원하던 정치 분야의 혁명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민주당에서 국민경선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정치혁명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구태의연한 행태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국민경선에 참가하는 유권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김근태 의원의 고백에서 밝혀진 것처럼 금품살포 문제도 상당히 개연성이 큰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의 경우 박근혜 의원이 탈당하자마자 이제 국민경선이 무의미해졌으니 대선 후보를 합의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강력하게 일어난 바 있다. 또한 일부 지방선거 후보도 상향식 공천보다는 추대의 형식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의원이 탈당의 명분으로 삼았던 1인 지배체제의 혁파를 위한 정당개혁은 깊이 논의조차 되어보지 못한 채 대선 승리를 위해 사장되어 있는 상태다.
최근 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비민주적 행태들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혁명을 뿌리에서부터 좌절시키는 반혁명적 흐름으로 판단된다. 특히 차기를 노리는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당내 경선과 대선에서의 승리에 집착해 민주적 가치의 내면화를 통해 제도혁명을 완수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이 큰 문제다.
과연 사태가 이런 식으로 방치되어도 좋은가. 결단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금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된 민주화의 과업을 완성해 민주체제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혁명의 순간에 당도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과업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선거 책략과 비민주적 관행에 의해 좌절된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장래를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작금에 진행되고 있는 갖가지 반혁명의 행태들을 제압하고 정치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국민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은 제2의 ‘6월 항쟁’을 전개한다는 심정으로 여야 각 정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혁명적 시도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시정하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내부고발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은 김근태 의원처럼 여야 모두에서 더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이런 힘든 역할을 자청해야 한다. 국민경선에 참여하는 유권자와 당원들도 금전살포 등 갖가지 반민주적 관행을 과감히 거부하고 감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국민 모두 나서 정치혁신을▼
시민단체와 언론도 나서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공고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 역사적 호기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정치혁명을 역류시키려는 모든 반혁명적 시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시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국의 정치가 미래를 향해 큰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75개국을 대상으로 최근 발표한 ‘2002년 세계 경쟁력 보고서’는 한국의 거시경제환경을 8위, 과학기술력을 9위로 평가하면서 정치경쟁력은 52위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정치의 현주소다. 이래 가지고는 한국경제를 세계 일류 수준으로 도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사회 전반의 발전에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한국정치를 혁신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고양시키기 위해 진정한 정치혁명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그리고 그 과업은 우리 국민 전체의 몫이다.
성경륭 한림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