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근.
프로농구 원년인 97년부터 힘과 높이를 갖춘 용병들이 국내에 영입되면서 국내 센터들의 활동 영역은 대폭 좁아졌다. 게다가 00-01시즌부터는 두 용병 신장의 합을 398.78cm로 제한, 선발 기준을 완화함으로써 대부분 팀이 용병 센터와 파워포워드를 선발하고 있다. 용병에 골밑 자리를 빼앗긴 국내 센터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현재 프로농구에서 뛰는 용병중 4(파워포워드), 5번(센터) 포지션이 아닌 선수는 단 한 명, SK나이츠의 제이미 부커(가드, 하니발의 대체용병) 뿐이다. 실상이 이렇다보니 국내 4,5번 선수들의 활동 폭은 대폭 좁아질 수밖에 없고, 현재 국내 센터 가운데 주전으로 뛰는 선수는 서장훈 만이 유일하다.
▼억대 연봉 선수가 벤치워머 전락▼
프로농구 4라운드 초반인 1월 8일까지 평균 출장시간이 10분 이상인 국내 센터는 4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서장훈을 제외한 나머지는 10분을 간신히 넘기는 식스맨이다. 포워드나 가드 포지션에서 10분 이상 뛴 국내 선수는 25명 안팎인 것을 감안한다면 국내 센터 포지션이 크게 위축되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가 된다.
지난 시즌 42경기에서 평균 29분을 뛰며 11.3득점, 6.1리바운드로 토종 리바운드 왕을 차지하기도 한 SK 빅스의 이은호는 올시즌 평균 9분 출장에 그치고 있다.
서장훈과 함께 국내 센터의 자존심을 지켜왔지만, 올시즌엔 맥도웰과 아이크의 가세로 백업 요원 신세가 됐다. 부상이나 슬럼프가 아니라 용병에 밀려 벤치에 앉아 있는 게 너무 당황스러웠다는 이은호는 “한 동안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어요” 라며 그간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경기에 못 뛰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적응이 안 되더라구요. 팀 성적을 위해서는 용병들이 잘하는게 흐뭇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쟤네 부상 안 당하나’하는 바램도 생겼어요. 바램이 컸던 탓인지 실제로 아이크가 부상 당하고 말았는데 그만큼 경기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이렇게 있을 바에야 차라리 딴 팀으로 가서 경기에 출장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동양의 박훈근도 마찬가지. 99-00시즌까지 LG에서 활약한 박훈근은 당시 팀내 최고 연봉(1억 2천만원)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 동양으로 이적하면서부터 그는 설 자리를 잃었다. 자신의 포지션과 겹치는 전희철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00-01시즌 용병 선발 기준 완화로 4, 5번 포지션 용병이 대폭 영입된 이유에서 이기도 하다. 99-00시즌까지는 상당수 팀이 용병 영입을 센터와 포워드 1명 혹은 가드 1명을 뽑음으로써 국내 장신 선수 2명이 동시에 출장해도 포메이션상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더블 포스트에 용병을 배치하고 있어 국내 장신 선수 2명 투입은 팀 전술상 어려운 실정이다. 결국 박훈근은 벤치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전희철 혹은 힉스가 부상당했을 때에만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형편인 것이다.
▼토종 센터에게 부상은 선수생활 끝?▼
울산 모비스의 센터 조동기는 한때 한기범, 김유택의 뒤를 이어받을만한 센터로 촉망받는 선수였다. 그렇지만, 허재, 강동희 등과 함께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던 그에게 프로 입문후 코트에 서 본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프로에서 용병제 도입으로 경기에 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데다 발목 부상까지 당해 잠시 코트를 비웠더니 자기 자리는 없더라는 것이다.
“다른 포지션은 부상 후 공백이 생기면 경기에 출장하면서 감각을 익혀가요. 이에 비해 출장 기회 자체가 적은 센터의 경우엔 코트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만한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 제 기량 회복은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에요.”
힘이 월등한 용병들과의 몸싸움이 잦아 부상 위험도가 가장 높은 골밑이지만, 국내 센터에게 한번 부상은 곧 선수 생활의 끝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된다. 이런 희생을 감수해야되는 선수는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다. 대학과 실업 무대에서 코트를 주름잡았던 표필상(SBS), 정재근(모비스), 정경호(삼보) 등도 그 같은 전철을 밟았고, 지금 프로농구에 뛰어든 후배들 역시 이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골밑에서 설 땅을 잃은 국내 센터들은 미들 라인이나 외곽 플레이에 치중하는 쪽으로 포지션 전향중이다. 실업이나 대학 무대에서는 유망한 센터로 이름을 날렸으나 프로에서는 포워드로 자리를 옮긴 정재근(KCC), 김재훈(SBS), 이규섭(삼성), 송영진(LG) 등이 그 예이다.
▼용병에 뺏기고, 팀에 희생하고▼
올시즌 드래프트 1순위로 LG에 입단, 신인왕 1순위로 점쳐지던 송영진은 시즌전 “오프 시즌동안 체중 불리기와 외곽슛 성공률 향상에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대학 때까지 골밑 농구를 해서 아직 외곽에 대해 확실한 자신감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밑은 용병 차지이다 보니 생존을 위해서는 외곽으로 빠지는 길밖에 없었다. 외곽 적응이 덜 된 송영진은 아직까지 골밑도, 그렇다고 외곽도 아닌 어쩡쩡한 포지션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래도 포지션을 전향해 새로운 살 길을 찾은 선수들은 그나마 낫다. 몇몇 센터에게는 이 포지션 전향마저도 여의치 않다. 포워드로 전향시 중거리 슛팅력과 스피드 향상이 단 시간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지만, 팀내 위치상 옮기지 못한 경우도 있다.
팀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용병의 체력 세이브가 필요하고, 그 백업으로 국내 선수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센터가 자신의 공간을 찾아 외곽으로 맴돌면 그것을 못 마땅해하고, 계속해서 골밑 플레이를 주문한다.
용병의 희생양이 된 것도 부족해 이제는 팀의 희생양까지 되어야하는게 국내 센터들의 불운한 현실이다. 용병의 희생양은 4, 5번 포지션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매해 대학을 졸업하는 30-40명의 농구 선수 가운데 KBL 드래프트에 선발되는 선수는 절반에 그치고 있다. 10년 넘게 농구에 매달려왔지만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해 하루 아침에 실직자로 전락하는 이 어린 선수들도 희생양인 셈이다.
서장훈은 “만약 용병을 1명 출전으로 제한된다면 10개 팀에서 10명의 국내 선수가 더 필요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국내 선수의 활용 폭도 커지고, 우리 후배들도 더 많이 프로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용병의 희생양이 된 국내 선수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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