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급 배우들은 하나같이 집요하다. 무서울 정도로.
40여년의 연기 인생동안 단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영화만을 고집해 온 안성기의 외길 인생은 집요함 그 자체다. 역대 TV 드라마 ‘모래시계’팀은 꼭 안성기를 출연시키겠다고 했으나 안성기의 한국 영화에 대한 더 집요한 사랑을 꺾을 수는 없었다.
1990년 당시 청춘스타로서 일년에 수 억대의 광고 수입을 올리던 박중훈. 최고로 잘 나가던 시절을 접고 미국 유학을 떠난 과단성도 사실은 장기 포석을 위한 집요함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Do you have time?’(지금 몇 시냐?)이라는 질문이 ‘혹시 시간 있냐’는 말로 착각하고 ‘Yes!’를 외쳤던 그는 2년 간 밤새 영어 사전을 끌어안고 씨름을 한 끝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석사학위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돈과 인기를 잠시 포기한 그의 ‘한 발 물러섬’은 더 큰 도약을 위한 ‘작전상 후퇴’ 였던 셈이다. 이후 영화 ‘투캅스’ 등으로 다시 인기 정상에 올랐다가 한 때 주춤했을 때 다시 6개월 간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돌아오자 마자 선택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로 다시 정상에 올랐다. 자신의 인생을 쉼없이 설계하는 그의 집요함은 영화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이다.
최근에 본 배우 중 ‘집요함 톱 투’는 단연 이성재와 유오성.
이성재는 영화 ‘신라의 달밤’ 촬영시만 해도 호리호리한 몸매였는데 ‘공공의 적’ 에서는 탄탄한 근육질로 바뀌어 있었다. 이 영화에 캐스팅 된 뒤로 이후 3개월 간 하루도 쉬지 않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달린 그를 놓고 헬스클럽 코치들은 ‘저렇게 몸 불리다가 몸 상하지’, 걱정했을 정도다. 그는 헬스 클럽을 출퇴근하듯 오갔고 음식을 조절하며 몸을 만들었다.
작년 초 겨울 배우골프모임에서 처음 골프를 친 이성재는 이후 하루 8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연습을 한 그는 3개월 뒤 다시 모인 골프 모임에서 티샷이 가장 멀리 나간 이에게 주는 ‘롱기스트(Longest)’상을 받았다.
조만간 촬영에 들어갈 새 영화 ‘빙우’에서 눈 덮힌 산과 빙벽을 타는 역을 맡은 그가 한동안 만년설과 빙벽에 파묻혀 살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유오성은 영화 ‘친구’의 고교생 시절을 촬영 당시 어려 보이기 위해 얼굴에 주름 펴는 주사까지 맞았다. 권투선수 김득구의 일생을 그린 영화 ‘챔피언’에 김득구역으로 출연한 그는 연기를 위해 아예 ‘권투선수’가 됐다. 다부진 근육은 기본, 그를 트레이닝 시킨 체육관 관계자들은 “신인왕전에 나가도 승산있다”고 유오성의 집요함을 인정했다.
평소에 그렇게 점잖고 유순한 한석규나 장동건도, 좌충우돌 덜렁대는 신현준도, 말없이 고독해 보이는 정우성도 촬영에만 들어가면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배역을 맡아 촬영에 임하는 게 아니라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아예 그 배역으로 인간이 바뀌어 사는 것이다. 좋은 배우는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김영찬 시나리오 작가 nkjak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