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커블 펜슬
《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술 과잉’은 소비자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종종 실패작으로 기록된다. 기능을 알 수 없는 TV 리모컨의 수많은 단추들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디자인 산업의 강국인 영국의 21세기 디자인 키워드는 ‘인간’이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을 디자인에 담아낸다. 영국 디자인 산업 현장의 모토이다시피한 ‘단순미’(Simplicity)와 ‘유지가능성’(Sustainability·환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디자인하는 것)이 그런 사례들. 최근 영국 런던에서 그들만의 노하우를 접했다.》
성공적인 디자인의 노하우는 의외로 간단하다. 소비자가 꼭 필요로 하는 기능만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하는 것이다.
수동 소형발전기로 작동하는 '프리플레이 라디오'. 전기나 배터리가 없는 곳에 무료로 배포된다. 이는 영국의 높은 시민의식이 디자인에 반영된 사례다
‘탠저린’(Tangerine)사의 2000년 히트작 브리티시 에어웨이스 항공사 비즈니스 클래스의 수평 의자는 너무 단순(Simple)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불편한 기내에서 가정의 침대 같은 자리에서 자고 싶다는 승객의 소망을 ‘인간 중심’의 아이디어로 해결했다. 좌석을 마주 보게 정렬, 한 아이디어가 공간의 확보를 가능케 했다. 이 디자인은 영국 디자인 카운슬이 선정하는 ‘밀레니엄 프로덕트’ 중 하나로 꼽혔고 2001년에는 국제 디자인 효율성 대회(IDEA)에서 대상을 받았다.
탠저린사의 맷 라운드 사장은 “인간의 소망과 디자인 문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으면 그런 디자인이 나오지 않는다”며 “디자인에서 인간의 회복이라는 명제는 무너질 수 없는 근본”이라고 말했다.
인간 친화적 디자인은 첨단 기술에 대한 소비자의 거부감을 없애고 에너지 낭비를 줄이는 장점도 갖는다. ‘프리스트먼 구드’(Priestman Goode)사의 난방기 ‘핫 스프링 래디에이터’(Hot Spring Radiator)는 말 그대로 볼펜 속에 있는 작은 스프링 모양이다. 일상 생활에 널려 있는 스프링 형태의 디자인으로 기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없앴다. 특히 이 제품은 용접 부분이 세군데밖에 없는 단순한 구조로 열효율을 높였고 제조 단가도 크게 낮췄다.
TKO의 드럼 분리 세탁기도 주부들의 실제 고충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 복잡한 기능을 과감히 생략하고 세탁기 드럼을 본체로부터 분리시켜 주부들이 세탁물을 꺼내지 않고 드럼째 빨래 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했다.
‘리마커블 펜슬스’(Remarkable Pencils)사는 폐타이어,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컵을 재활용해 연필 볼펜 자 수첩 등을 생산하는 회사. 이곳은 인간과 환경 친화적 개념인 ‘유지가능성’을 잘 적용한 예로 품질도 우수해 주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재활용품의 칙칙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산뜻한 원색을 사용했다.
‘유지가능성’은 영국의 전화번호부 ‘옐로 페이지’(Yellow Page)에서도 발견된다. ‘옐로 페이지’는 자간과 행간을 줄여 제작에 드는 연간 나무 소비량의 3분의 1을 줄이기도 했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대학원 조현신 교수는 “영국의 인간중심, 환경친화적 디자인은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탄탄한 시민 정신이 디자인에 반영된 것”이라며 “영국의 디자인 교육은 인간을 배려할 줄 아는 적극적 시민으로서의 디자이너 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영국 디자인 교육의 특징▼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패션 디자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원생들
영국 디자인 교육의 장점은 학생의 창의력을 최대한 존중하고 교육자의 영향력을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영국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 Design)의 한 작업실.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편안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고 있다. 그중 나이가 조금 들어보이는 이가 그래픽 디자인과의 학과장 앤드류 휘틀 교수.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으로 학생들과 섞여 있으면 몰라볼 정도다.
이처럼 휘틀 교수는 작업실에서 상주하며 학생들과 사고와 감정의 벽을 허문다. 이를 위해 이 학교에는 교수의 개인 연구실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있다.
조나단 배랫 학장은 “교수는 학생의 작품 활동에 대해 기본적인 기준만 제시할 뿐 나머지는 전적으로 학생에게 맡긴다”며 “교수의 지위와 권한이 강한 프랑스나 미국과 다르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디자인의 예술성과 상업성을 접목시키는 연구 풍토가 예술대학의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름난 예술대학이 실시하는 제품 디자인 프로젝트에 기업체들이 앞다투어 투자하며 대학도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디자인 경영’ 개념을 고취시킨다.
왕립 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s)의 존 드레인 디자인 엔니지어링 학과장은 “졸업작품의 상당수가 실용화 상업화되고 있다”며 “학부 때 디자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학생들도 2년만에 훌륭한 작품을 내놓는다”고 말했다.
영국의 디자인 교육은 중고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영국은 1996년부터 디자인 수업을 중고교 필수 과목으로 시행하고 있다. 영국 디자인 박물관은 전문교사를 고용해 박물관을 찾는 중고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하거나 전시 품목을 갖고 직접 학교를 ‘찾아가는 박물관’을 운영 중이다.
런던〓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