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고 또 달린다.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柳美里·33)씨에게 달리기는 뿌리를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글 쓰기를 위한 날갯짓이다.
1997년 소설 ‘가족 시네마’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았고 ‘골드 러시’ ‘생명’ ‘남자’ 등 문제작을 잇따라 낸 그가 17일 서울에서 열리는 2002 동아마라톤에 출전한다. 달리고 달려서 그가 이르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12일 오전, 봄 향기 가득한 가나가와(神奈川)현 가마쿠라(鎌倉)시. 감색 운동복 바지에 분홍색 티셔츠 차림의 유씨가 집을 나선다. 뛸 때마다 긴 갈래머리가 상체와 함께 찰랑인다. 심장의 박동이 가녀린 몸을 뚫고 나와 쿵쿵거린다. 뛰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취미 삼아 뛰는 게 아니에요. 외할아버지 때문에 뛰는 거예요. 동아마라톤도 외할아버지 때문에 출전하는 거고요.”
경남 밀양 출신인 유씨의 외할아버지는 양임득(梁任得·80년 68세로 작고)씨. 그는 일제 강점기 손기정(孫基禎)옹과 함께 마라톤의 기대주였다. 1940년 도쿄올림픽(제12회)에 나갈 예정이었으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올림픽이 무산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양씨는 해방기의 혼란 속에서 좌익으로 몰려 1949년 일본으로 피신했고 사상문제 때문에 28년 만인 1977년에야 고향에 돌아 올 수 있었다. 환갑을 훨씬 넘긴 그가 고향에서 다시 매달린 것은 달리기였다. 올림픽에 나갈 수도 없으련만 양씨는 아침저녁 인근 산과 들판을 누비며 뛰고 또 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후 세상을 떴다.
“일장기를 단 채 달려야 했던 한과 올림픽 출전이 무산됐을 때의 허망함, 그리고 늙어서도 그 분을 달리게 만든 열정은 무엇일까,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어요.”
유씨는 4년 전부터 자신의 뿌리찾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해 왔고 이 과정에서 외할아버지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 외할아버지의 족적을 찾아 4, 5차례 한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미리(美里·아름다운 마을)’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외할아버지였다.
“알아보면 볼수록 외할아버지는 수수께끼 같은 분이었어요. 그래서 직접 달리면서 내가 외할아버지가 돼 보자고 결심한 거지요.”
유씨는 지난해 말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동아마라톤 소식을 듣고 참가를 결심했다. 1월 중반부터는 선수출신인 사토 지에코(佐藤千惠子·33) 코치의 지도도 받고 있다. 연습은 주 3회. 한 번 뛰는 거리가 20∼30㎞에 달한다.
시내를 빠져 나온 유씨는 유이가하마의 봄 바닷바람을 헤치며 내쳐 달렸다. 1시간10여분 만에 반환점인 에노시마에 도착했다. 집에서 반환점까지는 13㎞ 정도. 함께 뛴 사토 코치가 “외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심장도 좋고 가능성도 크다”고 한마디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유씨에게 물었다. “완주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지요?” 유씨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목표는 완주”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에게 마라톤과 글 쓰기에 대해 물었다.
“달릴 때는 언제나 앞을 향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어오면서 내가 지켜온 ‘쓰는 자세’와도 같습니다. 달린다는 것은 날려는 새와 같지요. 그러나 날 수는 없지요. 다만 날갯짓을 보여줄 뿐이지요. 내 작품은 바로 나의 날갯짓입니다.”유씨가 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에노시마 해변의 바닷바람이 상쾌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