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명함엔 이름이 전혀 없다. 그저 ‘헐크 아잣씨’ 라고만 써있을 뿐이다. 아저씨도 아니고 아잣씨. 미술 조각계에선 헐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수종씨(55). 그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초대형 조각물을 완벽하게 옮기는 거의 유일한 전문가다. 최종태 계낙영 김정숙 이영학 윤영자 이정자 김경옥 황영숙 유대균 등 국내의 유명 조각가 중 그와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100㎏ 이상은 거의 무제한 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씨. 그가 직접 들어 운반할 수 있는 무게는 약 400㎏까지. 그 이상은 장비를 이용한다.
서너 사람이 달려들어도 끄덕없는 조각품을 혼자서 옮긴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의 진가는 대형 조각물을 실내로 옮기는데서 나타난다. 야외에서 야외로 옮기는 것이야 사실 ´크레인´같은 기계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실내로 들여놓는 것은 다르다.
1.4t 용달차와 2.5t 탑차, 소형 핸드카, 삼발이, 담요 수십장이 장비의 전부. 눈에 띄는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만의 노하는 무엇일까.
그의 싱거운 대답.
“노하우는 무슨 노하우…. 그저 경험이죠. 30년동안 이 일로 뼈가 굵다보면 요령이 생기게 마련이죠.”
진정한 노하우는 운반 테크닉이 아니라 외길을 걸어온 그의 고집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씨가 조각 운반을 시작한 때는 1970년대초. 충남 청양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71년 서울로 올라왔다. 175㎝, 90㎏의 그는 씨름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자장면도 배달하고 이런 저런 짐도 나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 조각품을 운반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구요. 계낙영 전북대교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잘 한다고 하시더군요.˝
이후 화물차 두 대를 장만해 조각품 운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일거리도 늘어났고 그의 주가도 올라갔다. 언제부터인가 헐크라는 별명이 붙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20년전엔 하루에 20, 30만원씩 벌었습니다. 잘 나갔죠. 전국 팔도를 다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번 돈은 심장병을 앓고있던 아들 치료비로 다 들어갔죠.˝
그는 조각품 소장가인 재벌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서울 성북동 평창동에서 남한강변 별장까지,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회장 집만 빼고는 유명한 부자들 집은 다 들어가 봤습니다. 배우 안성기씨의 부인이 조각가인데 그들이 연애하는 것도 줄곧 지켜봤죠.˝
외국 조각가들도 그의 운반 솜씨에 감탄한다. 1984년 경기 장흥 토탈미술관 개관시 미국 조각가 칼 스트리더의 20t이 넘는 작품 ´스카이´를 완벽하게 운반하자 작가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이씨에게 미국에 와서 조각품 운반에 관해 강연을 해달라고 제의한 적도 있다.
외국 전시를 해본 조각가들은 그의 운반 솜씨를 더욱 실감한다. 조각가 유대균의 말.
˝얼마전 일본에서 전시를 했는데 작품을 옮기느라 일본인 인부 6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헐크아저씨 따라가려면 어림 없더군요. 앞으로 해외 전시도 아저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힘이 예전 같지 않다. 조각품을 들 때 하도 이를 악물어서인지 치아도 많이 망가졌다.
˝힘이 많이 줄어 어떤 때는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이 보약도 사주곤 합니다. 그 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죠. 작품 나르다 죽겠습니다.˝
조각품 운반 30년. 그는 어느 작가의 조각을 가장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비싼 건 데, 모두 갖고 싶다˝며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육체는 힘들지만 마음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어느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통일´되면 가장 먼저 조각품을 실고 북한에 들어가 전시를 하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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