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경제 포커스]가계빚 급증 “괜찮아” “천만에”

입력 | 2002-03-13 17:28:00


서울 강남을 대표하는 신흥아파트인 도곡동 S아파트. 작년 11월 말 완공됐지만 지금까지 732가구 중 70% 정도만 입주했다. 전세 수요자들이 찾곤 하는 24평형도 144가구 중 100가구 정도 입주했고 나머지는 비어 있다. 인근 공인중개업소들은 “값이 너무 올라 거래가 안 된다”며 불만이다. 단지내 24평형 아파트 거래호가는 3억4000만∼3억8000만원.

재건축이 예정된 대치동의 C아파트는 31평형 매매가가 4억원을 훌쩍 넘었다. 정부에서 새 부동산안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호가가 1000만원씩 내렸다 반등하는 ‘이상’패턴을 보인다. 행여 저가의 급매물이 중개업소에 나오면 주민들이 몰려가 “여기서 장사하기 싫으냐”고 윽박지른다. 구로구 H아파트 부녀회는 아예 주민들에게 안내장을 돌려 ‘32평형 아파트를 1억7000만원 이하로 내놓지 말자’고 담합했다.

많은 금융전문가들은 이같은 부동산 ‘거품’의 주요원인은 가계여신 급증세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금융연구원이 최근 90년대 주택가격과 개인 금융부채의 추이를 되짚어본 결과 ‘금융부채가 늘어나면 부동산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입증됐다.

▽정부·금융권, “더 늘려도 된다”〓지난달 금융정책협의회는 “가계부채의 규모가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며 추가적으로 확대할 여지도 있다”고 진단했다. 과연 그럴까.

지난해 9월말 기준 국내 가계금융부채는 모두 334조9000억원. 총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9%로 미국의 60.0%(2000년 말 기준)보다 낮다. 은행 가계대출의 연체율 역시 1.21%(2001년말)로 미국의 2.8%보다 낮다. 가계여신 부실화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도마에 오르는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역시 지난해 290조원의 사용실적에도 불구하고 잔액기준으로 18조원대에 불과하다.

‘면죄부’같은 수치를 받아든 금융권은 가계대출 세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대출전쟁의 와중에서 국민 신한은행 등 ‘골리앗’들의 금리인하 공세도 벌어졌다. 가계대출의 예대마진은 98년 11월 6.02%에서 지난해 11월엔 3.16%까지 떨어졌다. H은행의 K실장은 “이렇게 마냥 늘어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다.

▽전문가들, “가계여신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봐야”〓가계의 금융자산-부채비율은 98년 2.9배에서 지난해 2.52배로 줄어든 것. 일본(3.97) 미국(4.38)보다 크게 낮은 수치다. 정부는 “우리 국민들은 부동산 등 실물자산이 많다”고 주장하지만 유동성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계여신을 소득수준별로 나눠 살핀다면 우려가 좀 더 커진다. 지난달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도시근로자중 소득 최상위계층은 가처분소득이 소비지출을 넘어서 월 178만원의 흑자를 낸 반면 최하위 계층은 8만3000원 적자를 냈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기가 살아나는 최근에도 고용수준은 여전히 열악해 저소득층이 빌린 돈은 불안하다”고 지적했다.

은행권은 ‘기업대출보다 가계대출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미 저축대부조합의 파산은 가계여신의 부실화에서 초래됐다”며 “가계대출이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위기 시나리오〓금융권과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금리 급상승. 수출이 살아나고 경기상승이 본격화하면 기업들이 설비투자 자금을 쓰면서 금리상승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한은 관계자는 “급증해버린 가계여신은 한은이 자율적으로 콜금리를 조정하는 데 부담을 줄 수준”이라고 밝혔다. 금리가 오른다면 335조원의 가계여신 중 신용이 가장 취약한 신용카드 대출에서부터 연체가 발생해 다른 부분으로 파급될 수 있다.

수도권에서는 오피스텔이나 아파트 분양업체가 중도금 대출을 알선해주면서 이자를 대납해왔다. 금리가 오르면 이들도 직격탄을 맞는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부동산 등 자산가격 상승세가 멈추는 경우다. 강남 아파트처럼 상승세가 멈춘 채 거래가 중단되면 은행 차입금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다시 돈을 꾸는 악순환에 빠진다.

또 가계부채가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이자부담 때문에 또다시 돈을 빌리는 악순환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금융연구원은 “가계여신은 순환적 특성이 강해 경기에 따라 급격히 부실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