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푸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낸가/조화신공(造化神工)이 물물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중략)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으로 받혀 놓고/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 화풍이 건닷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후략)
조선 성종 때 지어진 정극인의 가사 ‘상춘곡’의 몇 구로 시작해 본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만발하고 푸른 버들과 풀밭이 가는 빗속에 푸르기도 하다. 조물주의 재주가 칼로 오린 듯 붓으로 그린 듯 매력적이기만 한 봄이 왔다. 서울 한복판의 봄바람엔 비록 꽃향기는 없더라도 그런대로 햇바람이 코끝에 젊다.
수풀에 우는 새도 봄기운에 흥이 올라 소리마다 아양을 떤다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이 봄에 선조들의 지나온 문화를 유심히 놓고 보니 모든 감각을 곧추세워 자연을 느끼고 음미하는 섬세한 멋이 절절하여 새삼 놀랍다. 남정네들은 십수일새 농익은 바람을 안주 삼아 탁주 한 사발을 수월히 들이키고, 아낙들은 이에 질세라 산에 들에 분홍빛 흐드러진 두견화(진달래)를 똑똑 따서 떡을 부친다.
이름하여 화전. 요즘식으로 보면 디저트격인 화전은 쫄깃한 찹쌀 반죽에 꿀로 맛을 내는 전통 음식으로 뽀얀 바탕 위에 놓이는 두견화가 눈과 혀를 동시에 유혹하는데, 여기서 잠깐! 단순한 부침 위에 화려한 색으로 멋을 부린다는 점에 주목하여 일반 가정에서 만들기 쉬운 팬케이크에 응용해 보자. 담백한 찹쌀 반죽 대신 고소한 우유와 계란이 섞인 팬케이크 위에 제철 맞은 딸기를 꽃인양 올려 만든 ‘꽃과일 팬케이크’는 봄날 오후 마시는 홍차 한 잔과 좋은 짝이 될 수도 있겠다. 지금 막 뒷동산에서 꽃 따다 올린 그 맛만은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선 넉넉한 양푼을 준비한다. 밀가루와 계란, 우유를 한데 넣어 섞고 여기에 녹인 버터를 흘려주어 부드러움을 더하자. 이때 밀가루는 체에 쳐준 뒤 넣어야 포슬포슬 공기와 섞여서 완성 후 씹는 맛이 좋다. 멋으로 맛으로 올려지는 봄딸기의 당도를 제대로 느끼려면 우유와 설탕의 양을 줄이고 짙게 우린 홍찻물을 반죽에 섞어도 별미. 홍차의 떫은 향기에 딸기 속 숨어 있는 미세한 단맛이 쪽 빨려 올라온다.
팬케이크를 부칠 때 식후 디저트용이라면 주먹만한 크기로 얇게 만들고 든든한 간식대용이라면 좀더 크고 도톰하게 부치는데 식용유 대신 버터를 써야 반죽에 섞인 홍차향이나 위에 올려질 딸기의 맛이 둥글게 모아진다. 내친 김에 함께 곁들여질 시럽도 만들어 보자. 같은 양의 물과 설탕을 레몬 껍질과 한데 끓이면 반짝거리며 투명한 레몬 시럽이 되는데 여기에 민트잎을 한두 장 넣어주면 그 상큼한 향만으로도 벌써 침이 고이는 소스가 된다.
간지러운 봄바람에 과일로 꽃수를 놓은 음식을 앞에 두니 나같은 애주가는 이에 곁들일 와인 한 잔 생각이 절로 인다. 나른한 봄날 오후에 꽃과 과일을 감당할 술은 샴페인뿐이라. 발포성 와인 중 프랑스의 상파뉴 지방 산(産)만을 가려 ‘샴페인’이라 구분하는데 길다란 잔에 따라지는 그 고급스러운 황금빛과 은은한 향은 레몬시럽에 덮인 딸기와 팬케이크의 맛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 것이다.
게다가 입안에서 쏘아대는 샴페인의 기포가 청량하기까지 하니 꽃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술잔 수를 세지는 못한다 해도 한나절 멋으로는 어지간하지 싶다. 전형적인 봄날의 티타임을 선호한다면 발그레한 홍차류에 레몬 한 조각을 띄우자. 빳빳하게 새로 다린 식탁보 위에 꽃 한송이라도 꽂혀 있다면 그런대로 반듯한 티테이블이 되겠고 그 앞에 혼자면 혼자라서, 둘이면 정다워서 봄볕이 즐겁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봄은 짧다. 짧아서 더 아쉽고 더 예쁘다. 짧은 봄에의 찬미는 동서양이 같은가보다. 프랑스의 옛 문인은 그랬다. “사랑과 꽃은 봄을 넘기지 못한다”고. 가장 찬란할 때 꽃 구경하고, 가장 찬란할 때 사랑하자.
◆ 재료
밀가루 200g, 계란 1개, 우유 1컵, 홍차 1/2컵, 설탕 50g, 녹인 버터 3큰술, 여분의
버터 30g, 설탕 100g, 물 100g, 레몬 껍질 1큰술, 민트잎 2장, 딸기 100g.
◆ 만드는 법
(1)밀가루 계란 우유 홍차를 모두 섞어서 걸쭉한 반죽을 만든다.
(2)①에 설탕을 완전히 녹인 후 녹인 버터를 섞는다.
(3)작은 팬에 물 100g과 설탕 100g, 레몬껍질을 넣고 시럽이 되도록 끓인다.
(4)바닥이 두꺼운 팬에 30g의 버터를 칠해가며 ②의 반죽을 한 국자씩 붓고 굽는다
(처음엔 중간불, 1분 후 약한 불).
(5)④의 상단표면에 몽글몽글 구멍이 생기며 거의 다 익어가면 딸기를 예쁘게 얹고
완전히 익혀서 내린다.
(6)접시에 ⑤의 팬케이크를 담고 ③의 시럽을 끼얹어 맛을 낸다.
◆ 봄날 오후 볕 잘드는 찻집
모처럼 나선 봄나들이 길에 혹은 매일 지나던 길을 걷다가 잠시 앉아 차 한 잔 마셔보자. 서울 곳곳에 제법 볕이 잘 드는 찻집 몇 군데를 소개한다.
마포구 서교동 홍대 앞에 위치한 ‘리브로(02-322-8310)’는 예술관련 전문서점인 ‘아티누스’와 함께 있는 카페로 실내 공간도 분위기 있지만 따뜻한 날씨에는 테라스에 앉길 권한다. 홍차가 특히 맛있고 티라미수를 비롯한 케이크류를 주문하면 생과일을 듬뿍 곁들여 준다. 경복궁 역에서 내려 안국동길을 걷다가 현대 갤러리에 들러보자. 미술관 3층에 있는 카페 ‘파빌리온(02-734-6111)’은 통유리 창너머로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운치가 있다. 커피, 티와 케이크류를 즐길 수 있는 이곳은 개인적으로 봄비가 내리는 날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강남으로 내려와 청담동에 있는 ‘카페 드 플로라(02-514-6336)’에 멈춘다. 꽃의 여신이란 이름답게 이국적인 테라스엔 꽃이 있고 샹송이 흐른다. 각종 과일티와 초코바나나케이크가 인기메뉴. 압구정역 5번출구 뒤쪽에 위치한 ‘커피빈 앤 티리프(02-516-8024)’는 향이 진한 커피와 찻잎으로 유명하다. 특히 남향의 커다란 창가나 테라스 자리에 앉아 고소한 치즈케이크와 차 한 잔을 즐기기에 좋은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