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드:사이버공간의 법 이론/로렌스 레식 지음 김정오 옮김/543쪽 1만8000원 나남출판
코드 공개 운동의 지지자로 잘 알려진 미국 스탠퍼드대 로렌스 레식 교수(헌법학)는 어떻게 사이버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법적 행위와 불법행위를 규제하는 동시에 헌법 정신과 민주주의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주장의 이면에는 사이버공간은 현실 공간과 다르므로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규범과는 다른 별도의 규범 체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저자는 어떤 획기적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민주적 방법에 의해 열린 마음으로 해결책을 합의해 나가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저자 논지의 기본 전제는 사이버공간 역시 하나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제 현실 공간과 사이버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됐기 때문에 두 곳의 규범을 동시에 적용 받아야 한다. 그는 ‘현실 공간의 정부가 사이버공간에서의 삶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사이버공간에는 나름대로의 다른 주권이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오히려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은유다. 은유는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레식 교수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사이버공간이란 현실 공간과 구분될 수 있는 어떤 별도의 공간이 아니다. 현실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제는 현실적 법률 행위를 컴퓨터 등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서 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법적 행위 또는 불법적 행위의 수단이 되는 매체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것뿐이지, 갑자기 무슨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고 그 공간 속에서 우리가 살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화로 어떤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전화가 마련해 준 ‘전화 공간’에 들어가 법률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이 협박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그것이 별도의 ‘종이 위의 텍스트’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협박인 것도 아니다. 모두 현실 공간에서 특정한 매체를 사용해 이뤄진 법적 또는 불법적 행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으로 채팅을 하는 경우나 전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을 굳이 별도의 ‘사이버공간’에서 이뤄지는 것이라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 상의 게시판을 통해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을 했다고 하자. 이는 현실 공간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불법행위를 한 것이지 현실 공간과는 구별되는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런 명예훼손은 인쇄매체를 통해 이뤄진 것과는 여러 가지 다른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디지털 매체와 그것이 운반하는 디지털 정보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에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별도의 규범체계가 필요한 사이버공간’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김 주 환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