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수군 가족 7명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베이징 사무소에 전격 진입해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한국으로 가지 못하면 모두 자결하겠다”고 해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은 지 불과 8개월여 만에 또다시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소재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길수가족의 경우처럼 제3국 추방 뒤 한국으로 들어오게 하는 방안으로 마무리될 것 같은 이번 사건을 보면서, 탈북자문제가 더 이상 국제사회나 한국 정부가 방치해두거나 소극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주요 사안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재외 탈북자, 특히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북한 이탈주민이 국제미아 상태에 빠져버린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NGO-학계-언론 역할조정을▼
첫째, 국제난민법의 한계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법적 보호의 기준이 되는 것은 ‘유엔 난민협정’이다. 공식 난민이 되려면 두 가지 필요조건,즉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국적국 밖으로 탈출’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기아문제로 탈출한 북한주민은 비정치적 난민으로 국제난민조약에 따른 보호대상자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비정치적 유민(流民)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학계 및 비정부기구(NGO)들의 주장이 높아짐에 따라 UNHCR를 비롯한 여타 국제구호기관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냉전 이후 더욱 심각해진 대량 정치 난민사태를 해결하는 문제에서도 역부족인 실정이다.
셋째, 난민지위부여 문제는 원칙적으로 난민이 체류하고 있는 현지국의 주권사항이므로 설혹 UNHCR가 탈북자들에게 난민판정을 내려 국제법적 보호를 부여한다고 해도, 모든 탈북자들을 예외 없이 불법체류자로 규정하고 있는 중국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중국 내 탈북자 보호의 실효성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넷째, 한국 정부는 국제법적 근거에 의거한 중국 정부의 주장은 존중하되 탈북자 문제를 중국 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특별히 배려해 줄 것을 요청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조용한 외교를 유지해 왔다. 탈북자들 중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한국으로의 망명의사를 표시하고 있으나 우리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여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이유로 탈북자를 돕는 것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다섯째, 재외 탈북자의 정확한 정황 파악이 쉽지 않아 이들에 대한 국제사회나 한국 정부의 원조규모 설정 및 UNHCR의 일시보호 대상자 판정 등 대책 마련이 힘들다. 무엇보다도 정부 차원에서 조사 발표된 중국 내 탈북자의 수치와 NGO들이 주장하는 수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UNHCR는 탈북자 규모를 3만명 정도로, 중국은 비공식적으로 1만명 미만으로, 우리 정부는 약 1만∼2만명 정도에서 많게는 3만명까지, 그리고 NGO들은 10만∼30만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길수가족이나 이번 탈북 25명의 경우에서처럼 극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탈북자들이 인도주의적인 차원으로 보호나 원조를 받을 확률은 극히 낮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두 사건을 마무리한 중국 정부의 반응이다. 중국정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사태를 해결하지만 이들은 난민이 아니라는 공식적인 전제를 분명히 함으로써, 탈북자 정책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길수가족 사건 이후 중국당국의 단속과 강제송환 강화로 중국 내 탈북자들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졌던 점을 상기해볼 때, 이번 사건은 재외 탈북자들을 최악의 강제송환 위험에 직면하게 할 수도 있다.
▼´일시보호제´도입해 볼만▼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탈북자 보호를 위해서는 국내외 NGO, 학계, 언론 등의 산발적인 노력이 조정 또는 통합될 필요가 있다. 최근 2, 3년 사이 중국과 북한 양측의 국경경비와 탈북자 검색이 강화된 배경에는 탈북자의 참상을 다룬 언론보도나 NGO들의 보고서, 국제난민지위 획득 움직임 등이 양측 정부를 자극한 면도 없지 않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탈북자의 남한 입국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이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는 UNHCR와의 협력 하에 현실적인 대안으로 ‘일시보호’와 같은 방법으로 탈북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일시보호제란 관련당사국이 합의해 피난민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정권과의 대화와 교류 및 협력 확대를 위해 노력하되 인권보호 등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양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신화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