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길 위에 지상의 모든 길을 모으는 러너들-러너들은 행복하다"
일만 이천 러너들의 집결장소인 경복궁은 마치 흥겨운 잔칫집 같았다. 42.195km의 고통스러운 역주를 앞두고도 그들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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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추워"를 연발하면서도 맨살을 스치고 지나가는 상쾌한 봄바람이 싫지 않은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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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미리 “이제 당당해질 수 있어요”
한편에서는 몸을 풀기 위해 벌써부터 열을 지어 가볍게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기념 촬영이 한창이다. 경향 각지에서 달려온 깃발들을 알아보고 서로 부르고 반갑게 답하는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러 나온 가족들의 환호….
축제 분위기에 한껏 들뜬 1만2000명의 참가자들을 통제하여 하나의 출발선에 세우기는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달리려는 이유가 제각각이듯 그들은 각자의 출발선과 각자의 주로를 따로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들을 한자리에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껏 그들이 달려온 무수한 길들을 하나의 출발선 위에 모아 놓아야 할 터였다.
고적대의 뒤를 따라 출발지인 세종문화회관 앞까지 천천히 움직여갈 때까지만해도 그들은 일만 이천의 좌충우돌하는 에너지 덩어리들이었다.
그들의 열기와 흥분은, 선두에 선 엘리트 선수들의 경직된 긴장을 압도하고 시민들의 환호조차도 멋쩍게 만들어버렸다. 과연 이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경기를 끝마칠 수 있을까? 출발 직전 30초 카운트가 시작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탕, 하는 출발 신호와 함께 분위기는 돌변했다. 그들은 갑자기 하나의 물결을 이루어 힘차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길 위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차츰 무표정해졌다. 상쾌한 봄바람도, 손짓하며 부르는 유적과 명소들도 그들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그들은 어느새 익숙한 침묵 속을 달리고 있었다. 새로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달릴 뿐이다.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길이 이끄는 대로 달릴 뿐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잠실 구장까지, 그 하나의 길 위에서 완전한 하나가 되어버린 러너들. 일만 이천의 육체가 기억하는 일만 이천의 길들이 하나로 모여들던 그 순간엔,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현대인들. 무의미한 말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떠내려가고 있는 우리는 너나없이 고독하고 불행하다.
그에 비하면,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침묵 속에서 타인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러너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행복한 러너들이 행복한 완주를 위해 달리고 있는 동안 엘리트 선수들은 자국의 이름을 어깨에 걸고 분투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싸워 이겨야 할 적이 더욱 많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무서운 경쟁자들을 그들은 반드시 제쳐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서 자꾸만 일어서는 새로운 길을 정복해야 하고, 함부로 치고 나가고 싶은 욕심도 다스려야 한다.
영광의 월계관을 위해, 그들은 하나 되어 달리는 행복을 버리고 고독한 승부에 몸을 던져야 한다.
월계관은 일본의 후지타 아쓰시 선수에게, 2위는 스페인의 카멜 지아니 후아시시 선수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3위는 자랑스러운 우리 선수 임진수가 차지했다.
노련한 페이스 조절로서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후지다 아쓰시 선수에게 축하를 보내며 또한 임진수 선수의 역주에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소설가 조민희씨
기대를 모았던 많은 선수들이 오버페이스의 함정에 빠져서 경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자신의 최고 기록에 미치지 못하고 그친 데 비해 한국의 임진수 선수가 보여준 투지는 눈부셨다.
자신의 기록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2시간 6∼7분대의 기록 보유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도 결코 자신감을 잃지 않고 결승점까지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진정한 영광을 차지한 임진수 선수가, 동아 마라톤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준 서울의 시민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주었기를 바란다.
조민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