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에 걸린 가장(박근형 분)의 심정을 그린 영화 '아버지'의 한 장면
청천벽력(靑天霹靂),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듯 하다. 주위에서 말기는 아니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위로했지만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도저히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씩 “왜 하필 나냐”를 되뇐다. 잠시라도 혼자 있으면 눈물이 흘러 내린다.
최근 대장암 수술을 받은 정모씨(60·서울 송파구 잠실동)가 의사와 구체적 치료 일정을 상의하기 전 한 달 동안의 심리상태는 대충 이러했다. 정씨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게 마련이고 급격한 심리 변화를 겪는다.
정씨는 “가족이 눈물을 흘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때 힘들었다”면서 “나도 힘든데 식구들을 달래줘야 할 때는 정말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암 환자가 암과의 사투(死鬪)에서 이기기 위해서나, 또는 삶을 편안히 정리하고 이승을 떠나기 위해서나 가족이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가족이 당연하다고 던진 말이나 행동이 환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더러는 환자 가족이 맹목적인 간병으로 환자가 떠난 뒤 경제적으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기도 한다. 암 환자의 가족은 의연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더러 냉철하기까지 해야 한다.
▽암 환자의 심리〓정씨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암 환자는 △절망적 사실에 충격받고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부정기’ △불면증 식욕상실 등에 시달리고 수시로 울며 “왜 하필 내가 걸렸느냐”고 낙담하는 ‘반응성 우울기’ △의사와 치료계획에 대해 상의 하면서 마음을 다잡는 ‘낙관기’ 등을 거친다.
이후 종교에 귀의하거나 기존의 신앙생활에 몰입하는 사람도 많다. 이와 같은 과정은 인체가 충격을 최소화하고 소화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암 환자의 식구들은 이런 변화 과정을 알고 환자를 대해야 한다. 물론 모든 환자가 똑같은 심리 과정을 겪지는 않으므로 환자의 상태나 평소 성격 등을 고려해야 한다.
환자가 암이라는 사실을 모를 경우 이를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사실 정답이 없다. 환자가 “놀라지 않을테니 솔직히 얘기하라”고 다그쳐 암이란 사실을 알려줬다가 환자가 까무러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쨌든 암에 걸린 사실을 알릴 때에는 가족이 의연해야 한다. 가족이 의연하고 따뜻하게 암 발병 사실을 알리면 환자에게 극복 의지가 생기지만 하얗게 질리거나 통곡하는 등 약한 모습을 보이면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기 일쑤이고 치료 성과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환자의 가족은 속죄인이 아니다〓일부 가족은 죄의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암은 수 십 년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생기기 때문데 죄의식의 대부분은 근거없는 것. 또 가족이 암에 걸리면 하루종일 환자 옆에서 간병하고 근신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간병인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유지하면 결국 환자의 회복에도 좋다. 암 환자의 가족도 영화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서 즐거운 얘기를 나누는 등 ‘정상 생활’을 해야 한다. 간병인도 혼자서 하기보다는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좋다. 또 환자 옆에서 늘 우울한 모습으로 있기보다는 자주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환자 옆에서 가족이 불안감을 보이면 환자에게 곧바로 전염된다.
▽조타수(操舵手)가 필요하다〓암 환자의 가족 중에는 더러 “왜 형이 준 것은 먹고 내가 준 것은 처박아 놓느냐”면서 섭섭해 하는 사람도 있다. 간호 및 치료방법 때문에 가족끼리 분란이 있을 수도 있다.
암 환자의 가족 중에 나이, 믿음감 등을 고려해서 ‘조타수’를 정하는 것이 좋다.
암 환자의 가족들은 비방(秘方)이나 온갖 식품을 사오는 등 ‘헛돈’을 쓰곤 하며 더러 암 환자 치료 때문에 가정경제가 거덜나기도 한다. ‘조타수’가 치료비를 모아서 합리적으로 쓰도록 하고 치료 방법이나 간병인 선정도 이를 중심으로 의논하는 것이 좋다. 조타수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면 환자가 황당무계한 치료법에 빠지지 않고 가장 효율적으로 치료받는 데 도움이 된다.
조타수는 가족회의를 통해서 정하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암 환자도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도록 하며 어떤 일이라도 암 환자가 뻔히 보는 데에서 환자를 따돌리고 의논하는 것은 좋지 않다. (도움말〓서울대 의대 정신과 정도언 교수)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 암 치료중 심리변화
암 환자는 대개 일정한 심리변화 과정을 겪는다. 의료진과 치료계획을 세울 때에는 상당수가 이전의 비관적 심정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대부분 첫 번째 치료에 큰 희망을 건다.
치료 과정에서는 치료방법에 따라 심리변화가 다르다. 수술이 주치료법일 때 일부는 두려움 때문에 수술을 거부한다. 수술 전후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는 생각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항암화학요법을 받는 환자는 “수술이 안되니까…”하며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약물요법으로 완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상당수는 처음 부작용이 오면 당황하고 치료를 거부한다. 이 과정을 지나면 치료 거부반응은 줄어든다.
방사선치료를 받는 사람은 어마어마한 기계에 압도당한다. 암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의사, 간호사, 가족 등의 인간적 관계가 중요하다.
입원치료가 끝나고 외래진료를 받기 시작하면 초기에는 환자가 그동안의 난관을 이겨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에 싸인다. 삶에 대한 열의가 생기고 사소한 것에도 고마워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검진날이 닥치면 재발과 전이에 대해 두려워해서 악몽 불안감 등에 시달린다.
5년이 무사히 지나가면 자신감이 생기지만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