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환자곁에서]애처럼 보채는 남편

입력 | 2002-03-17 17:44:00


“선생님. 아내가 언제 오나요?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야 하는데….”

늘 어린 아이 보채듯 칭얼거리는 K씨는 부인과 함게 차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30대 중반의 남자.

평소 그는 점잖은 성격으로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고 뒤부터 부인과는 조금도 떨어져 지내지 못하고 매사에 짜증을 냈다.

부인은 남편의 이상한 행동에 견디다 못해 K씨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환자의 병명은 교통사고 충격으로 생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 미국 뉴욕시에서 일어난 9·11 테러와 같은 엄청난 참사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교통사고 등 예기치 못한 일을 겪고 난 뒤 생기는 정신 질환이다.

“언제나 내 곁에만 있어야 돼. 매일 맛있는 음식을 해서 먹여줘.”

부인을 자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대하는 환자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다. 교통사고로 입은 정신적 충격으로 환자의 기억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평형을 잃어버렸고 사고 전 모범적이었던 가장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식까지 있는 환자가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 배경에는 계모 밑에서 자란 성장과정이 있었다. 환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그리워했고 부인을 통해 결핍된 모정을 보상받으려 했다.

우울증 불안 수면장애 등의 동반 증상은 약물치료로 쉽게 나았지만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는 증상을 치료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치료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역시 환자의 부인이었다. 나는 부인에게 남편의 상태를 설명한 뒤 ‘엄마손’ 역할을 부탁했다. 엄마와 같은 따뜻한 보살핌으로 환자는 빠르게 호전됐고 3개월 뒤부터는 사고 전보다 더 원숙한 사람으로 변했다.

많은 PTSD 환자는 증상이 있는데도 스스로는 물론 주변에서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해 그대로 지낸다. PTSD는 결코 불치의 병이 아니다. ‘마음의 타임머신’을 타고 환자의 과거로 돌아가 문제의 원인을 찾고 꾸준히 치료를 하면 사고가 나기 전보다 훨씬 인격적으로 풍성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민수(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교수)

차지완기자 marud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