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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대 울리히 벡 교수 인터뷰 전문

입력 | 2002-03-17 18:12:00


독일의 세계적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 뮌헨대 교수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근대성과 탈근대성, 그의 위험사회론과 9·11 테러,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등 우리시대 사회변동의 흐름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가 맡았다.

-선생께서는 우리시대의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제2의 근대성'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제2의 근대성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근대성' 또는 '탈근대성'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습니까?

"제가 '제2의 근대성'을 이야기한 배경에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급격한 사회변동이 있습니다. 이미 막스 베버가 말한 바 있는 세계의 '탈주술화'는 오늘날 제1의 산업사회적·민족국가적 근대의 기반에서까지 관철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근대의 '자연적인' 기반이자 자명한 구성요소로 인식돼 온 것들이 이제는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동안 번영해 왔던 유럽의 전후(戰後) 질서가 더 이상 신성화되며 사회발전사의 종착점으로 절대화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제1의 근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사회와 민족국가의 동일시, 즉 민족국가적으로 조직된 사회의 컨테이너-모델, 둘째 정상적인 완전고용사회라는 이상, 즉 표준화된 고용노동으로 이뤄지는 생활사를 바탕으로 한 노동관계를 정상적 노동관계로 간주하는 관점, 셋째 계급구조에 뿌리박은 대중정당, 넷째 남녀의 귀속적인 역할구분에 기반한 핵가족 형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과 사회, 우리와 타자, 삶과 죽음, 지식과 무지 사이의 분명한 경계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그 설득력을 잃고 있는 가정들입니다. 저는 뮌헨에서 이러한 테마들에 관한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데, 저 자신도 어떻게 우리들이 아주 이질적인 행위영역들 및 체계들 전반에 걸쳐서 일종의 메타-변동, 즉 사회변동의 준거체계와 기반들의 변동을 분석하고 이론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놀라곤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영역, 생활세계와 사회구조로부터 경제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수행한 연구들이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 구분의 척도가 되어왔던 경계를 뒤섞는,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다원성과 양가성의 새로운 사회관계입니다. 여기에서는 분명한 경계와 질서에 기반해 있던 제1의 근대의 기초적 제도들이 의문시됩니다. 이런 현실은 행위자들과 조직들에게 엄청난 혼란과 결정상의 문제를 유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변화된 현실의 문제들을 적절히 처리하기 위한 일상화된 대응방식이나 결정절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제1, 제2의 근대성을 구분하는 것은 양자에게 공통된 '근대성 일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근대성'이라는 점에 있어서의 공통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연구에서 근대성의 기본 '원리'들(예를 들어 국가성)과 제1, 제2의 근대성의 기본 '제도'들(예를 들어 제1의 근대에서의 민족국가와 제2의 근대에서의 코스모폴리탄적 국가)을 구분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대성'이 현재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며 또한 미래에는 어떻게 정의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상이한 관점과 체험영역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점과 관련해서는 주변부와 중심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북미의 근대화 체험 및 근대성의 기획들을 고려하면서 논쟁이 이뤄질 것이며 또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2의 근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동시에 서구 근대화이론 및 사회학에 대한 급진적 자기비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대안적인 근대성의 목표들, 가치들, 전제들, 그리고 경로들을 둘러싼 전지구적인 논쟁들을 위한 공간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근대성의 내부에서 사회적인, 그리고 사회과학적인 패러다임 변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변동에 직면하여 우리들은 적절한 응답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들과 새로운 사회정치적 제도들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탈근대의 이론가들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탈근대는 이 세계의 새로운 상황을 정의내리기 위한 개념과 연구의 노력을 마비시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감옥에 갇혀 여전히 몰역사적이고 순환적인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문화적 타자를 품어 안고, 시급히 적절한 관념과 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선생의 이론에 따르면 '위험사회'의 도래는 제2의 근대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9·11 테러는 위험사회의 한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위험사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 위험사회에 대처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볼 때에 '위험사회'의 핵심적인 특징은 측정가능한 리스크(risk·리스크는 구조 및 체계와 관련된 위험을 뜻한다)와 측정불가능한 불확실성 사이의 경계, '객관적인' 리스크 분석과 사회적인 리스크 '지각'(知覺)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회적 결과에 대해 저는 1986년에 출간된 '위험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첫째, 위험은 마치 '전쟁과 같은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위험이란 말은 전염성이 강한 것입니다. 즉, 기존의 사회적 궁핍이 계층별로 차별적이었던 데 반해, 새로운 위험은 민주적입니다. 그것은 빈자와 약자뿐만 아니라 부자와 권력자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시장은 정지하고, 법체계는 형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며, 정부는 고발당하는 동시에 새로운 행위기회를 획득하기도 합니다.

둘째, 우리들은 '세계 위험공동체'의 성원이 됩니다. 위험들은 더 이상 그 진원이 되는 국가의 국내적 사안만이 아니며, 또한 한 나라가 혼자만의 힘으로 위험을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전지구적 국내정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전문가들의 역할이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됩니다. 과학들과 그것을 가시화시키는 기술들로 인해서 '나에게는 아무런 리스크도 보이지 않으므로 리스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의문시되게 됐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리스크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스크에 대한 의식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넷째, 불안이 삶의 느낌을 규정하게 됩니다. 안전이라는 가치가 평등이라는 가치를 몰아냅니다. 그와 더불어 안전에 관련된 법적 규제가 엄격해지고, 외견상 이성적인 듯이 보이는 '위험방지의 전체주의'에로 이르게 됩니다.

다섯째, 일반화된 신경과민과 더불어 '불안경제'가 활성화됩니다. 불신하며 의심하는 시민이라면,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해 검사되고 감시되고 조사받고 심문받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안전은 이제 물이나 전기와 같이 공적으로 생산된 소비재가 될 것입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서의 테러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구조적 특성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세계화와 정보화가 우리시대 사회변동의 두 가지 추동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세계화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세계화의 다층적 측면들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사회학적 맥락에서 세계화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선생은 세계화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초민족적 국가'와 '하위정치'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과연 이 전략들은 세계화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사회과학은 사회·정치·역사에 대한 기본적 이해방식에서부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제1의 근대에서는 일종의 '방법론적 민족주의'가 형성됐습니다. 즉, 사회들은 민족국가의 단위로 조직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국가는 사회를 창조하고 통제하고 보장해주는 존재로 통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국가라는 권력공간 내에서 탄생하고 존속하는 그릇과 같이 생각됐습니다. 이처럼 사회와 민족국가를 동일시하는 관점은 사회학의 이해방식, 개념들, 관점들, 나아가 사회학적 상상력에까지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민족국가는 사회학에서 세계를 지각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이 오늘날 의문스러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민족국가가 이제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사회적 행위자들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바라보는 민족적 관점이 사회과학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와 민족국가를 동일시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우리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 국내정치와 대외정치의 경계,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9·11 테러 이후에 분명해졌습니다. 전지구적으로 지각된 테러위협에 직면하여 우리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공간을 뛰어넘는 위험이 존재하는 이 시기에 국내적 안보는 더 이상 자신만의 문제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동맹의 형성은 이전에도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제 전지구적 동맹이 대외적 안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국내적 안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전의 대외정책은 필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새로운 종류라 할 수 있는 '이도 저도 모두'라는 공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즉, 대외정책과 국내정치, 국가적 안보와 국제적 협력은 직접적으로 결부돼 있습니다. 세계화된 위협적 테러뿐만 아니라, 나아가 재정위기와 환경재앙, 그리고 조직 범죄 등에 직면해서 국내적 안보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국가간 협력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역설적인 원칙이 적용됩니다. 즉 국가들이 세계화된 세계 속에서 자신의 국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특히 민족적 이해관계를 위해서 스스로를 탈민족화하고 자신의 자율성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도전들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찾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오직 하나의 길만이 남아있습니다.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국제적인 계약과 협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하나의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1970년대에는 '전쟁이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공식이 유효했다면, 21세기 초반에는 '전쟁이 아니라 법이다!'라는 공식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란 저서에서 강조하셨듯이, 오늘날 친밀성의 변동은 서구사회는 물론 비서구사회에서도 중요한 사회변동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도 최근 30대 이혼율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랑과 친밀성의 혼란을 낳았습니까? 그리고 '제2의 근대' 사회에서 삶의 윤리적 원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를 뒤흔드는 모든 변화들 가운데 우리들의 개인적인 삶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변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우리는 성(性), 결혼, 부모의 성격, 이혼 등과 같은 문제에서 근본적인 변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함께 삶'과 '따로 삶', 혹은 양자의 혼합이 이루어지는 형태들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놓여있는 거대한 혁명의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이제 한때 당연하게도 '가족'이라고 불렀던, 얼핏 영원한 것처럼 보였던 규범을 의문시하고 붕괴시키며 새롭게 협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밀한 관계의 '본성', 성별간 및 세대간 관계에 있어서의 권리와 의무들, 집단성과 개인성의 문제, 연대와 정체성의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견해들이 겨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메타-변동이 다양한 지역과 문화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유럽과 북미에서의 변화는 한국, 인도, 아프리카 혹은 남미에서의 변화와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변동의 거대우주는 가족이라는 미시우주 속에서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전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내부와 외부, 전쟁과 평화, 우리와 타자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새롭게 정착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삶에서도 내부와 외부, 우리와 타자,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에 대한 정의는 점점 더 유동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는 많은 새로운 개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난자기증자와 대리모, 생물학적 부모와 사회적 부모, 혼인증명서 없는 부부, 동성애적 파트너쉽, 짜집기 가족, 이혼후 가족 등과 같은 개념들 말입니다.

생활형태와 경계짓기에서의 이런 다원화가 일어나게 된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우리들이 '제도화된 개인주의화'라고 부르는 사회변동입니다. 이 개념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중의 변동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이전에 사람들의 삶을 가장 밀접하게 규정해 왔던 전통적 사회관계, 결속, 신앙체계가 점점 더 의미를 상실해 갑니다. 가족모임으로부터 마을공동체와 종교, 그리고 나아가 사회계급과 신분, 성별역할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일상에서 한때는 틀과 규칙을 제공했던 모든 것들이 점차적으로 깨지기 쉬운 것으로 돼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개개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자유공간과 선택가능성 그리고 선택의 강요가 이뤄집니다. 개개인들은 최소한의 한계 내에서나마 크고 작은 제한적 조건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며, 또한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의 증대와 더불어 개인주의화의 또 하나의 측면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근대사회에서 태동한 각종 제도들, 예를 들어 노동시장, 복지국가, 교육체계, 법체계, 관료제 등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런 제도들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규칙, 요구, 척도, 전제들을 산출해냅니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전체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개인을 그 단위로 해서 조직돼 있습니다.

이런 규칙들의 결정적 특징은 개개인들로 하여금 가족이나 그밖의 집단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자신의 삶'을 이끌어가기를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즉, 이 제도들은 때때로 개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집단의 결속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것에 간여하지 않고 행위하도록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제도들의 원칙은 바로 '네 자신의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화가 모든 사회적 결속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기실현과 타자를 위한 현존이라는,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과제는 친교관계, 네트워크, 사회도덕 등과 같이 스스로 선택한 사회관계들을 통해 서로 결합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서구사회에서처럼 이른바 '자유의 아이들'의 도래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아이들은 개인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의 경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의 아이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선생께서 알고 계시듯이, 동아시아에서는 유교 윤리로부터 영향받은 공동체주의적 전통이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조화할 수 있습니까?

"저는 개인주의화가 자동적으로 정치적인 무관심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아이들'은 공동체에 대한 자신들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공동체는 자기실현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당이나 노조 등과 같이 이제까지 정치적 의지를 형성해 온 조직에서는 개인들의 자아실현을 집단적 이익에 종속시켜 왔습니다. 의회정치 및 정부정책이라는 의미에서의 정치는 집합화된 이익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가시적이며 안정적인 (이제까지는 민족국가적으로 이해되어 온) 사회구조와 그런 구조에 부합하는 정당 및 단체들을 전제로 합니다. 정치학에서 그 기초가 놓여진 이익 개념은 하나의 집단적 사회성과 연관되는데, 바로 이 집단적 사회성은 개인주의화 및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의문스러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즉 제2의 근대의 역동성은 국가적·정치적 행위의 집단적·구속적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들을 지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권의 기초 위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가 생성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인주의화된 공동체와 가족관계는 더 이상 주어진 집단적 규범, 위계, 조직에 의해서 정의되고 통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리스크를 동반한 자유', 즉 '비-통합'에 의해 정의됩니다.

우리는 이제 리스크를 동반한 자유의 법적·정치적·경제적 '구성규범'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어진 규범적 모범, 혹은 인간, 남성, 여성, 유태인, 흑인, 아랍인, 한국인 혹은 미국인에 대한 어떠한 실체주의적 정의도 이제는 더 이상 구속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문화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평등한 동시에 다양한 존재들로서 공존할 수 있을 것인지를 발견하려는 목표를 가진 하나의 실험이 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화되고 세계화된 생활연관과 경험연관들은 우선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이 가치의 타락이나 자아도취 같은 망령들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위협은 다양한 생활세계들의 창조적 동력을 정치적이고 공적인 주제들로 변화시키는 데 실패하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개인주의화된 생활연관들의 기반을 찾기 위한 모색이 사적이고 심리적이며 밀교적인 것으로의 끝없는 퇴행으로 치닫는 경우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화는 '원자화'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원자화는 전통이 제공해 주었던 확실성을 대신해 줄 사회적 삶의 연관을 발전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게끔 해 줄 제도적 전제조건들을 결핍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즉, 개인주의화와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도, 개인적인 삶의 기반들이 오직 타인들과의 공적이고 정치적인 교류 속에서만 획득되고 방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 깨어있을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들과 여자들, 흑인들과 백인들, 기독교도들과 회교도들, 불교도들과 유태인들이 비개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비실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정의를 공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저는 아직까지 아무도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는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라는 저서에서 좌파와 우파의 전통적인 이분법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셨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이 이분법이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이런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질문을 다시 한번 세계화의 문제와 연계시켜 보자면, 세계화와 더불어 일국적 정치공간 내에 새로운 갈등의 역동성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화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 사람들과 잃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상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실은, 이 '승리자'와 '패배자'라는 범주가 제1의 근대에서 통용되었던 대립 및 정치적 갈등 전선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화 과정에서의 패배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일국적 경계 내에서 생활을 보장받아 온 사람들, 그리고 일국적 경계의 해체가 곧 자신의 사회적 지위 및 사회보장에 대한 위협을 의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갈등의 동학은 무엇보다도 시장관계로부터 보호된 부문과 시장에 노출된 부문 사이에서 형성되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국제적인 탈규제의 압력 하에서 양 부문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런 새로운 대립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제1의 근대에서의 계급적 대립으로까지 번져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보호받는 산업부문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회사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보호주의적 조처들을 존속시키는 데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또한 기존의 계급적 대립이 앞으로도 존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 부문에서의 기업들은 당연히 임금비용을 절감하고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떠한 경우에서이든 제1의 근대에서와 같은 좌우 대립의 사회적 기반은 잠식되고 재구성될 것이며, 가능한 경우에는 세계화의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갈등구조 속으로 재조직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승리자와 패배자 모두 하나의 일국적 공간 내에서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승리자와 패배자의 구성은 국가적 맥락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이미 여기서 우리가 민족국가적 경계를 뛰어넘어 이런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래에도 '좌파와 우파'라는 은유가 계속 존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에 예컨대 세계개방적 민족주의와 보호주의적 민족주의의 대립축이 들어설 것인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통합'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의미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통합'이란 단어는 배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포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배제적 통합이란 민족적 혹은 인종적 동질성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화적 표준화와 동질화, 또는 미국화 혹은 서구적 생활양식 및 정치이념의 전지구적 확장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와 달리, 포용적 통합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타자를 배제하고 스스로를 폐쇄하는 민족국가가 새로운 행위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고, 국가간의 제도적·조직적 연결망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통합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소위 '다국가적'인 혹은 '코스모폴리탄적'인 국가로 변화돼야 합니다.

코스모폴리탄적인 국가는 일국의 정치적 결정을 그 나라의 경계 내외부에 있는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과 연결시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결정의 원칙을 부정하거나 저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결정의 원칙을 일국적 일면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세계의 요청에 대한 개방이라는 원칙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스모폴리탄적 국가가 기반하고 있는 원칙은 국가가 민족적 경계와 무관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테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베스트팔렌 조약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통해 16세기의 종교적 내전을 종식시켰듯이, 20∼21세기의 민족적 세계내전은 국가와 민족의 분리를 통해 응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종교적인 국가가 상이한 종교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유사하게 코스모폴리탄적 국가들은 헌정적 관용의 원칙을 통해서 다양한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정체성들이 경계를 넘어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 합니다.

폐쇄적인 민족적 혹은 인종적 국가인가 아니면 개방적인 코스모폴리탄적 국가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좌우 대립의 은유는―설령 그것이 계속 존속한다고 하더라도―그 의미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사람들은 세계개방적인 좌파와 보호주의적 좌파를 구분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우파적 지향 및 정당들의 경우에도, 경계를 개방하라는 경제적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의 요청들을 문화적 타자에 대한 요새 구축이라는 과제와 어떻게 결합시켜야 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봉착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모토를 따르는 새로운 정치적 혼합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즉, 세계화의 승리자들에게는 신자유주의를 제시하고, 세계화의 패배자들에게는 외국인 및 테러리즘에 대한 두려움에 불을 붙이며 인종주의의 독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민족적 단계에서 '코스모폴리탄주의'라는 아주 오래된 이념은 분명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바와 같은 '구제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코스모폴리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 사이에 대립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은 그 자신의 뿌리와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즉, 코스모폴리탄주의는 인간애라는 천상으로부터 내려와 장소와 지역의 새로운 의미에 연계되어야 합니다.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국지성의 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구부러진 나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볼 때, 개개인들의 제한성을 억지로 펴는 대신에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이러한 인간관이야말로 '땅에 뿌리박은 코스모폴리탄주의'의 핵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유럽이라는 실험은 코스모폴리탄적인 국가형성의 실험으로서 새롭게 사고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 자의식적 민족들이 구성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유럽이라는 기획, 그것은 아마도 대체로 현실주의적인 유토피아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