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호를 구분할 때 BC(Before Ch-rist·기원전)와 AC(After Christ·기원후) 대신에 BT(Before Terror·테러전)와 AT(After Terror·테러후)를 쓴다고 한다. 9·11테러 전과 후의 세상이 너무 바뀌어서 이렇게 구분할 만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경우엔 과장된 얘기가 아닌 듯 싶다. 테러 후 미국인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 세계질서를 보는 눈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근 공개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핵 태세 검토(NPR)’ 보고서도 그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국가에 대해서는 핵공격도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 대상 국가로 북한 이라크 등 7개국을 지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비핵 국가에 대해서는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전략이 수정된 것” “사용할 수 없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 개념으로 바꾼 것”이라는 등의 해석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가톨릭대 이삼성(李三成·국제정치) 교수도 지적했지만 미국은 70년대 중반부터 신축대응 전략을 구사해 왔고, 이에 따라 국지전에서의 핵 사용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 왔다. 그동안 미국이 개발한 수많은 전술핵무기들이 그 증거다.
문제는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인식과 스타일이다. 한반도만 떼어놓고 보자. 새 보고서는 문제해결의 수단을 ‘보상’에서 ‘응징’으로 바꾸고 있다. 94년 제네바 기본합의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의 큰 틀은 보상이었다. 핵 개발 중지의 대가로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키로 한 것은 한 예였다. 그러나 이제는 응징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아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억지효과가 클지 단정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응징이 상대방의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동기(動機)까지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한 ‘우발 전쟁론’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억지이론에서 더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은 ‘계산된 전쟁’이 아니라 위협에 대한 과대 평가, 잘못된 정보, 기계의 오작동 등으로 인한 우발적 전쟁이다. 북한을 핵공격 대상 국가로 지목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우발적 전쟁의 위험이 줄어들까, 아니면 늘어날까. 부시 행정부가 과연 이런 본질적인 문제까지 검토했는지 궁금하다.
보고서는 핵전략의 기본이라고 할만한 애매모호성(ambiguity)의 원칙도 무시하고 있다. 핵무기의 억지력은 대체로 그 불확실성에서 온다. 핵을 가지고 있는지, 사용할 의지가 있는지를 상대방이 정확히 모를 때 억지효과가 있다. 상대(북한)를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지하까지 관통하는 신형 핵무기를 쓰겠다’고 하는, ‘공언’하는 식의 접근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상대를 자극해 적개심을 부추기고 불필요한 긴장만 고조시킬 뿐이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에 가려 전혀 걸러지지 않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연상케 할 정도다. 그 가운데서 휩쓸려 떠내려가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부시 행정부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햇볕정책이 손상될까 봐서인지 이 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92년 노태우(盧泰愚) 정권 아래서 남북한이 애써 만들어 냈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한낱 휴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물론 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한반도에서의 건설적인 핵 논의의 시발이라는 역사성을 갖는다. 남북간 핵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정부든 정치권이든 이 문제를 직시했으면 한다.
이재호 국제부장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