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은 최근 거의 예외 없이 중국에 관한 특집을 연재하는 등 중국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출판계에서도 중국 관련 도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집기사는 대부분 중국의 놀랄 만한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한국 경제의 향방에 관한 것이 차지하고 있고, 한류(韓流)와 한류(漢流)에 대한 기사도 경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진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제제일주의 관점이 과연 온전한 것일까. 중국경제가 질주하여 낙관적인 전망대로 대량소비사회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까. 가령 중국인 모두가 한국인처럼 자동차를 보유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지구가 감당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에너지가 많이 소비될 것임은 분명하다. 남북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닦이고 서부 오지에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는 것이 ‘대역사’이기만 할까. 자본주의의 ‘궁전’인 백화점이 전국으로 퍼져가고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가 대륙 전체를 덮을 때, 소비 욕구가 증대되고 소비는 거대한 규모로 증폭되며, 한편으로 상대적인 빈곤감과 박탈감도 따라서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은 중국만의 문제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에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중국을 보는 눈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에 깔려 있는 의식의 반영이다. ‘부자아빠’만이 아버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아파트 평수는 갈수록 넓어지고, 소비와 레저가 넘쳐나는 사회. 그것을 더 넓히고 더 넘쳐내기 위한 기회가 중국시장에 있다고 보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것이 중국경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을 말할 때 근대사의 연속으로서 오늘의 중국이 있음을 망각해선 안 된다. 오늘의 중국은 구조적인 변화 속에서도 근대사를 반복해내면서 진행된다. 개방개혁 정책 이후 급속히 발전한 경제특구는 과거의 조계(租界)와 유사하다. 아편전쟁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해 나간 지역은 상하이, 톈진, 한커우 등 바다 연안과 양쯔강의 새로운 물자집산지였고, 이런 도시 속에서도 특히 외국자본이 유입되고 전통 중국의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조계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바다와 양쯔강을 잇는 T자형 도시발전구조는 이미 개항 이후 시작된 것으로 오늘날 도시발전의 위계와 뿌리를 같이한다.
20세기 초 북부 중국이 남부 중국의 근대공업품 소비시장이었던 일방적인 물류의 상황은, 오늘날 베이징에 전력을 보내주는 화력발전소가 있는 지방 주민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매연뿐”이라고 푸념하는 지역문제로 복사되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의 중국 이해에 근대가 실종된 이유의 하나는 ‘침탈당하고 거기에 저항한 역사’로 기술된 근대중국사가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의 중국근대사는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으로 그 유효성이 이미 종언을 고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중국경제의 발전은 곧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며, 전지구적 생태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중국의 경제발전을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연관시켜 자문하고 자답하기 시작해야 한다.
하세봉 동의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