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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화진포…화장기 거둔 '누님'을 만났다

입력 | 2002-03-19 17:31:00


바람이 분다.

산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이 제법 거세게 얼굴을 때린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태산준령이 본격적으로 숨을 고르는 모양이다. 남녘에선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 3월 중순 어느 날. 화진포는 다소 거친 바람으로 봄나들이 손님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따스한 봄 햇살에 취해버린 상춘객들은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다. 엄마 손을 꼭 쥔 아이의 얼굴에서도, 한껏 폼을 재고 카메라 앞에 선 촌로(村老)의 얼굴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즐겨 찾았다는 곳. 드라마 ‘가을 동화’의 무대가 되면서 더욱 유명해진 곳. 그러나 화진포는 그 정도 유명세를 타는 곳 치고는 화려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군인 휴양소로 쓰이는 4층 높이의 콘도와 3층짜리 해양박물관 외에는 이렇다할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모래 시계’의 인기를 업고 카페다 뭐다 하며 요란하게 치장한 정동진과는 사뭇 다르다. 백사장 입구에 ‘가을 동화’의 사진을 몇 장 붙여놓은 것이 여기가 드라마 촬영 장소라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꾸밈이 없고 소박하다는 점. 그게 바로 화진포의 매력이다. 만약 여기저기 화장을 덧칠한다면 오히려 본연의 아름다움이 가려질지도 모를 일.

화진포는 그렇게 여러 개의 맨 얼굴을 지녔다. 첫 번째 얼굴은 남한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꼽히는 화진포호. 둘레가 16㎞에 이르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호수다. 5월이면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화진포(花津浦)’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화진포호는 바다의 일부가 해안에서 분리돼 형성된 석호(潟湖)다. 오랜 세월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쌓여 사주(砂洲)를 이루고 이 사주가 바다와 호수를 갈라놓은 것. 민물과 바닷물의 비율은 7대 3. 그래서 붕어 잉어같은 민물고기와 바다에서 올라온 숭어 전어 등 바닷고기가 함께 서식한다.

눈길을 호수 주변으로 옮기면 화진포의 두 번째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호수를 감싸고 있는 송림(松林)이다. 우람하지도 왜소하지도 않은 적당한 키의 소나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짙푸른 소나무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머리 속이 상쾌하다.

가을이면 호숫가에 갈대밭이 들어선다고 한다. 그 무렵부터 찾아드는 겨울 철새가 갈대밭과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은 가을 화진포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화진포의 또다른 얼굴을 보러 바닷가로 나서면 소나무의 초록빛에 편안하던 눈이 잠시 아릿해진다.

‘백사장’이라는 말의 뜻에 딱 들어맞는 하얀 모래가 눈을 자극하기 때문. 수만 년 동안 조개껍데기와 화강암이 부서져 만들어진 화진포 해변의 모래가 여인의 분같다. 밟으면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18세기초 지리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울 명(鳴)자에 모래 사(沙)자를 붙여 ‘명사’라고 기록돼 있다.

‘가을 동화’의 주인공 은서와 준서가 어린 시절 모래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던 곳이 이 백사장이다. 그리고 준서가 싸늘히 식어가는 은서를 업고 하염없이 걸었던 곳도 바로 여기다.

해변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는 거북을 닮은 섬 금구도가 있다. 금구도는 신라시대 수군이 기지로 사용했던 곳. 지금도 돌로 참호를 구축하고 성을 쌓은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화진포는 한갓진 분위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쉬고 싶어 하는 유력자들을 불러모았다.

광복 전에는 일본인들이 즐겨 찾았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기붕 전 부통령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김일성 전주석이 한국 전쟁 전까지 가족과 여가를 보낸 별장도 해안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그 가운데 이기붕 전 부통령의 별장만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세 사람의 별장 모두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별장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가졌던 권력을 감안하면 초라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화진포는 사랑을 꽃피우고 영원을 약속하던 정겨운 곳이었다. 1960년대말 이씨스터즈는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라는 노래에서 ‘황금물결 찰랑대는 정다운 바닷가/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아…’라고 노래했다.

그때 이곳에서 사랑을 맺은 사람이라면 지금 환갑에 즈음했을 나이.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화진포〓금동근기자 gold@donga.com

◆ 그곳에 가면

요즘 여행을 자주하는 나는 속초에서 동해를 끼고 북쪽으로 가는 길을 좋아한다. 한 시간쯤 달리면 조그만 어항 풍경이 비린내와 함께 펼쳐진다. 곧 철조망이 해안 길을 막고. 휴전선 턱밑 남한의 북쪽 끝. 길이 왼쪽으로 꺾이어 조금 더 북쪽으로 가다보면 갈대밭으로 둘러싸인 호수가 나온다. 바로 화진포. 이 일대는 접적구역이었으나 몇 년전 개방됐다.

호수를 끼고 마주 보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일성 전주석의 별장은 역사적 무게까지 더한다. 광복 후 한반도의 남북을 갈라 통치했던 두 거인이 왜 하필 이곳에다 별장을 지었을까. 한국 분단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호숫가의 이 전 대통령 별장엔 유품들도 전시해 놓았는데 검소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김 전주석 별장은 바다 옆 얕은 언덕 위에 있다. 김 전주석은 전쟁이 끝난 뒤 별장을 빼앗기고 얼마나 아쉬워했을 것이며 굳이 위험한 먼 곳에 별장을 세운 이 전 대통령의 고집은 무엇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편다. 호수에서 나오면 바로 바닷가. 빛 바랜 역사의 한 장면에서 속계로 나온다. 바다와 호수와 역사가 다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느끼면 된다.

(삼성경제연구소장)

◆ 베스트 펜션-예뫼송

▽위치〓강원 양양군 강현면(033-671-3011)

▽특징〓깔끔한 샤워 시설과 벽난로를 갖춘 통나무방과 황토방이 있다. 2층에서는 설악해수욕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낙산사까지는 걸어서 5∼10분 거리. 대포항과 후진항이 근처에 있어 신선한 회를 맛보기에 좋다. 설악산 입구와 오색약수도 멀지 않은 편.

화진포 인근에는 이렇다 할 펜션이 없고 1시간가량 떨어진 예뫼송이 가장 가깝다.

▽가격〓2인용 통나무방은 평일 4만원, 주말 5만∼6만원. 3, 4인용 황토방은 2인 기준으로 4만원이고 1명 추가 때마다 5000원씩 더 받는다. 5∼8인용 황토방은 4인 기준 6만원, 4인이 넘을 때 1명에 5000원씩 추가.(가격은 숙소 사정과 계절에 따라 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