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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칼럼]최민/홍상수 그리고 ´영화의 발견´

입력 | 2002-03-21 18:30:00


지난주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생활의 발견’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극장 개봉 전에 열린 이 두 번째 시사회는 호기심에 찬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몇 년 전 그의 첫 번째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시사회가 몇 사람 안 되는 관객으로 썰렁했던 기억이 있다. 그 사이 홍 감독이 널리 알려지고 그의 영화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기대했던 대로 그의 새 영화는 예술로서의 영화를 다시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새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라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낡은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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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침없는 예술영화의 혼▼

흥행 위주의 대작 상업영화가 판치는 오늘의 한국 영화계에서 홍상수라는 인물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작가의 길을 고집하며 자기 나름의 길을 가는 흔치 않은 감독이다. 마치 소설가처럼 삶의 미세한 결을 예리하게 관찰해 독자적 스타일로 그것을 영상에 담아내는 영화적 탐구를 계속해오고 있다.

약간 엉뚱한 ‘생활의 발견’이라는 제목도 이번 영화에 잘 어울린다. 동시에 이 영화는 ‘영화의 발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관습적으로 만든 것 같아도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홍 감독 나름의 새로운 성찰이 담겨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 배우가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두 여자를 만나 정사를 벌이는 과정을 통해 홍 감독은 특유의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이들의 하찮은 행위를 들여다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그런 대로 의미있고, 때로는 어처구니없고, 때로는 기괴하기도 한 말과 행위를 담담하게 그려 보여준다. 앞선 작품들에 비해 극적인 밀도가 떨어지는 것 같으나 삶을 관조하는 적절한 거리와 함께 작가로서의 심리적 여유랄까 원숙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작품이면 뭘 하나. 시사회 후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시사회 때만 만원이지 정작 극장 개봉을 하면 별 볼일 없을 걸”하는 농담을 했다. 뼈있는 농담이다.

홍 감독의 경우를 보면서 영화에서도 선택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상업적 성공이냐, 예술적 성취냐’의 둘 중에 하나를 명쾌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술과 달리 영화는 우선 산업적인 기반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이라고 하더라도 산업과 예술의 혼성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기 때문에 흥행이라는 것이 어떤 영화의 경우에도 필수적인 고려사항이다.

이 점에서 극장에 걸리는 모든 영화는 상업영화라는 말이 맞다. 홍 감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위 ‘예술영화’ ‘상업영화’의 구별도 정도의 차이 문제지 완전하게 질적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예술영화’, 또는 ‘작가(주의)영화’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제작자나 감독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정해야 한다. 희생할 것은 희생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선택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노리는 데서 영화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결국 흥행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본다.

외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예술영화’, 또는 ‘작가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그는 재능도 있지만 행운도 뒤따르는 감독이다. 신통치 않은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고 싶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윤보다는 명예를 택하기로 작정하고 투자한 제작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평론가들의 성원과 칸영화제를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의 평판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작가 감독을 기다리며▼

한국에는 홍 감독 같은 인물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예술영화’ ‘작가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영화가 다 그렇게 제작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홍상수 같은 ‘작가’가 발을 붙이고 작업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영화의 질을 높이고자 희생을 아끼지 않는 제작자가 더 많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관객의 취향이 보다 분화되고 개별화되어 일시적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각자 나름대로 자기에게 맞는 작품을 골라보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한국의 영화문화는 아직 분화되지 않은 초창기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미학